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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Jun 23. 2022

한국에는 산이 많다 2

창을 맞고 드러누운 짐승들의 나라


너라도 없었다면!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나는 아직도 그리운 사람이 있고

산은 또 저만치서 등성이를 웅크린 채

창 꽂힌 짐승처럼 더운 김을 뿜는다


황지우, <비 그친 새벽 산에서> 시 중



*

동생과 원주에 갔다 왔다. 객기 넘치게 오후 열두 시에 출발해서 하루 반나절을 쓰고 가고 싶었던 알탕 집이 브레이크에 걸려 또 반나절을 썼다. 운전연습 겸 가는 길을 동생에게 맡겼더니 1시간 30분 길이 3시간이 되었다. 서울에서 강원도까지의 여정은 우리를 둘러싼 산의 향연이었다. 우중충한 여름 하늘, 자욱한 비구름, 햇빛을 잃어서 칙칙한 색깔의 무성한 산들. 그러다가 나왔던 말이다. 황지우 시인의 시구 중에 산을 기가 막히게 묘사한 대목이 있다고.


집으로 돌아와 찾아본 시어는 과연 좋았다. 내심 아쉬움이 들었던 이유는 동생이 전해준 문장이 조금 더 내 입맛에 맞았기 때문이다. 동생은 산의 모양을 창을 맞고 드러누운 짐승에 비유한 시가 있다고 말했다. 지금은 여름이라 나뭇잎이 덮여있지만, 한 겨울 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이 거대한 산에 이쑤시개처럼 박혀있는 모습은 시 속 묘사 그 자체일 거라고.


무수히 많은 창을 맞고 드러누운 짐승.


언젠가 산이 무섭다는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바다처럼 숨이 막혀 자연히 죽어버리는 게 아니라 산에 있는 무언가에 쫓기고 길을 잃어서 깊은 곳으로 떨어져 죽게 될까 봐 무섭다고. 여전히 산은 무섭지만, 한국에 산이 많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개만 돌리면 펼쳐져있는 그 산들이 참 많은 것을 숨겨줬다. 산 없이 평야뿐인 나라였다면, 정부로부터 도망쳐봤자 금방 잡히고 말았을 테니까.


한국전쟁 당시 마을단위의 학살 피해를 조사, 정리한 도서 <전쟁과 기억>의 후반부에는 여순항쟁의 전쟁 기억을 이야기한다. 1948년 10월 19일에 일어난 항쟁은 10월 27일 정부군이 여수를 장악하는 것으로 8일 만에 막을 내렸다. 목숨을 부지한 군인들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계속했다. 지리산은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여 북한군에 합류하기까지 그들의 주요 활동지가 되었다.

어릴 때는 빨치산이라는 단어가 생소했다. 빨갱이라는 단어와 한 글자가 겹치고, 맨 끝에 붙은 글자처럼 늘 산과 엮여서 등장하는 것이 무섭고 낯설었다. 어쩐지 입에 담으면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아 더 궁금해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시 찾아본 빨치산은 파르티산(partisan)이라는 러시아어로, 적군의 편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비정규군을 칭하는 말이었다. 정부와 뜻이 같지 않아 무장투쟁을 하는 사람들 전부를 포함한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도 나라의 뜻에 반하였으니 빨치산 활동이다.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던 목소리 역시 빨치산이다. 제주도 토벌 명령을 거부한 군인도 빨치산이다. 그렇게 정부로부터 도망친 사람들은 산으로 들어갔다. 지리산으로, 북한산으로, 백두대간으로. 정부의 견제에 불안감을 느낀 국민들은 입산을 자처했고, 그렇게 산에 살며 먹고 자는 사람들을 산사람이라고 불렀다. 제주도 사람들도 학살을 피하기 위해 산에 숨었다. 가족이 좌익인 사람들도 산으로 숨었다. 한국의 산은 그런 역할을 했다. 귀신이 많고 많을만하다.


창 꽂힌 짐승처럼 더운 김을 내는 황지우 시인의 산과


무수히 많은 창을 맞고 드러누운 짐승 같다는 동생의 산.


저 많은 산들이 나라에서 갈 곳 없는 사람들을 꼭 품고 있었다. 총을 맞고 끌려가는 것이 비일비재한 세상에서 창 꽂힌 짐승만이 국민이면서도 국민 취급받지 못한 사람들을 숨겨주었다.


한국은 산이 많다. 그것은 무섭고 다행스럽다. 나라가 말해주지 않는 것들을 병풍 같은 산들이 다 담고 있을 테니까.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 많은 유해들을 그나마 숲과 나무가 덮어주고 있을 테니까.





https://brunch.co.kr/@kimgood949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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