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가끔 신나는 일도 생기는 거야
“사람우 인생이란.”
“......”
“살아가는 동안 마디가 하나씩 하나씩 생기다가 그라고 나믄 가는 기라. (후략)”
박경리, <토지 11>
*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다.
간만에 술을 진탕 먹고 이틀 연속 변기에 머리를 처박은 채로 보냈더니 도착한 서류를 들춰볼 힘도 없는 상태다. 거북이처럼 살고 싶다. 다음 한 발짝을 내딛을 기운만 남겨놓은 상태로.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인다. 적당히 작년보다 더 안 좋아졌고, 낡아가고 있다. 드라마틱하지 않아서 좋다. 오래 사용하는 물건이 부실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목 디스크와 경추에서 좋지 않은 진단을 받았다. 아마 지금 사는 집의 계단과 복층 때문일 것이다. 이층에 올라가면 허리를 펴고 걸을 수가 없다. 천장이 애매하게 낮아서 상체를 옹크린 채로 돌아다녀야 하는 높이. 회사 짐은 어찌나 많은지, 지난 주말도 재고정리를 하다가 허리에서 오독오독 소리가 났다. 오래 살 집은 되지 못할 곳이다. 침실이 이층에 있으니 적어도 하루 두 번씩은 꼬박꼬박 등허리를 고생시키며, 술마신채로 화장실을 갈 때면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상상을 하며. 그래도 참 예쁜 집이다. 모이는 돈 하나 없지만 이 집에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기분이 좋다. 아직도 집들이를 한 적 없지만 친구를 볼 때마다 놀러 오라는 말은 여러 번 했다. 한번 살아보았으니 됐다. 이런 꿈같은 집에, 드라마 같은 공간에. 내년에는 주차공간이 넉넉하고 공원과 도서관이 가까이 있는, 방 두 개 이상의 조용한 곳에 들어가고 싶다. 가능하면 반려동물도 동반이 가능한. 벌써 어딘가에서 지금 서울땅에 그런 조건을 달고서는 돈 몇천으로 들어갈 수 있는 집은 없다고 비웃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도 꿈은 꿀 수 있지. 반지하에서 곰팡이와 바퀴벌레와 뒹굴게 되더라도, 그런 집에 살고 싶다는 꿈은 꿀 수 있지. 중고로 허리 쿠션과 경추 베개를 샀다. 당분간은 이 솜뭉치들로 허리 상태를 완화해 볼 생각이다. 디스크 수술 같은 건 꿈도 꾸기 싫으니까.
사실 내년이 되면 철썩같이 잘릴 줄 알았다. 2년 계약직에 재계약이 안되면 그냥 나가야 하는 거니까. 그래서 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의 막차를 알아보고, 서류를 떼고, 증빙 자료를 준비했다. 6년 전 호주로 처음 떠날 적에는 고작 20만 원 언저리였던 비자 신청 비용이 2024년에는 60만 원으로 올랐다. 떨어져도 출국을 못해도 신청하는 것만으로도 60만 원. 건강검진 비용 20만 원은 따로. 회사와 재계약을 하면 약 100만 원 가까이 되는 돈을 땅에 버리는 게 된다. 갑자기 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느냐 하면, 이번 회계연도의 성과평가 피드백을 받았기 때문이다. 배 째라는 심정으로 나잘났소 하고 제출했는데 돌아온 대답도 너 잘났네였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키아누 리브스 같은 수염을 기른 팀장님은 말수가 적고 효율적인 상사다. 탄산수를 들이켜는 것 같은 깔끔함과 담백함을 가진 사람. 면담을 요청할 때 담임선생님을 만나는 것처럼 긴장되지만 그의 문장과 요구 하나하나가 타당하다.
오피스에서 자주 마주칠 일이 없어 인사도 일주일에 한두 번 하는 정도라도 나는 그분을 아주 좋아한다. 그런 상사가 코멘트를 달아준 근 1년간의 나의 성과가 너 그래도 꽤 잘났어 라니. 슬쩍 내년이 되어도 안 잘릴 것 같은 기대감이 든다. 어떡할까. 100만 원 버린다 생각하고 호주행 비자를 신청해 둘까, 지금처럼 이틀 내내 토하면서 회사에서 시키는 일이나 열심히 할까. 작년 이맘때의 나는 회사가 견디기 힘들어 허둥거리고 있었다. 이다음엔 더 힘들어지고, 더 버거워지고, 더 외로워지고. 지금은 회사에서 내가 뭘 해야 하는 인간인가는 인지하고 있다. 좋은 팀과 함께 멋진 브랜드의 얼굴로 돌아다니는 일을 하고 있다.
죽네 사네 했어도 이 회사에 들어온 것으로 마디 하나가 생긴 건지도 모르겠다.
인생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