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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Sep 05. 2024

누군가는 오늘이 생일이래요

누군가는 오늘이 기일이겠죠

세상 사는게 늘 그렇듯이!


생일 날인 오늘 아침 아는 오빠에게 문자를 받았다.

‘생일을 축하해주려고 했는데 숙모님이 돌아가셔서 못 가게 됐어. 미안해.‘

모두의 생일은 누군가의 기일일 텐데. 기일이 생일만큼 기억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것은 단연 기뻐할 사람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태어남을 축하하며 한 해 한 해를 살아나가던 생명이, 기일 이후로는 추모도 그리움도 받지 못할 먼 곳으로 떠나버렸기 때문에.

누군가의 생일은 누군가가 죽은 날이다. 지구는 매일매일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이 교차되며 굴러간다. 어딘가에 전쟁이 터지고 있을 때 반대쪽에서는 디너파티에 가고 있듯이.

기이하다. 숙모님의 명복을 빈다. 좋은 곳으로 가셨기를.


나는 지금 전주의 어느 돈가스 집에서 생맥주와 함께 생일 만찬을 하고 있다. 기념일에 둔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올해는 유독 쓸쓸한 것이 생일이 가는 게 아쉬운 기분이다. 하루 중 절반은 생일이라는 것도 까먹고 운전으로 보냈는데 이제 와서.

시끌벅적한 생일은 싫다. 고스란히 마음의 빚으로 쌓이게 되니 선물 하나 받는 것도 조심스럽다. 회사에 입사한 후로 나는 매 생일마다 휴무를 신청해 고즈넉하게 하루를 보낸다. 이번 생일은 조용해도 너무 조용해서 그런가, 부쩍 외로워져서 그런가. 오랜만에 느끼는 생경한 공허함이다. 괜히 아무도 모르는 곳에 토라진 티를 내고 싶어서 글을 쓴다. 내가 아니면 또 누가 내 생일을 챙겨주겠어. 그날이 뭐 그렇게 특별한 날이라고. 동네방네 떠벌리기는커녕 누가 축하의 말이라도 해줄라치면 손사래를 치면서 사양했던 게 누군데.

창피해서 살 수가 없다. 생일을 가지고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다니 어린애가 따로 없다. 일전에 동생이 ‘영혼의 나이’를 알려주는 무당이 있다고 하길래 다녀온 적이 있다. 동생의 나이는 380살, 내 나이는 17살이었다. 육체의 나이와는 상관없는 영혼의 나이. 나는 영원히 17살일 것이다. 완전 어리지도 또 성숙하지도 못한 채 늘 고민하고 방황하며 더 이상 젊다고는 할 수 없는 육체에서 풋내기처럼 살아야 한다. 그 말이 진실인가 헛소리인가는 나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당의 말에 수긍하게 되는 이유는 나에게 있다. 자신이 이미 부족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한때 말버릇처럼 나이를 물어보는 사람들에게‘마음만은 17살이야!’라고 말하고 다녔고 지금도 친구들을 만나면 ‘믿을 수가 없어. 나는 아직도 고등학생인 것 같은데.’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나는 만년 17살이었다. 무당이 나의 영혼의 나이로 말한 숫자, 열일곱. 내가 항상 되고 싶었고, 돌아가고 싶었던 숫자 열일곱.


아, 나이 얘기를 하니까 깨달았다.

오늘이 공식적인 나의 서른 번째 생일이다. 나는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서른 살인 것이다. 서른 살. 서른 살은 뭘까. 왜 지나간 날들이 이렇게 아득하게 느껴지는지. 어쩐지 빛바래고 뿌연 사진 필름을 보는 것처럼.

그냥 청승이다. 영 외로워서 무슨 이유라도 붙이고 싶은 모양이다. 500짜리 생맥주를 비운 지금은 다른 곳에서 한잔을 더 하고 갈지, 아니면 그냥 호텔로 돌아갈지 고민을 하고 있다.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술을 더 마실까? 아니면 씻고 자게 될까?

술을 마신다면, 아는 곳에 가서 제임슨을 마시게 될까 아니면 처음 보는 곳에 들어가서 모르는 술을 마시게 될까?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나의 삼십 대는, 내 미래는, 죽음은?

오늘로써 완전히 떠나버린 나의 이십 대는 결국 무엇이었을까, 나의 삶에서.




추신.

나는 내가 좋아하는 곳이지만 손님은 없는 바에 왔다.

왜냐하면 나는 이 글을 마무리하기 위해 조금 더 걷고 싶었고, 그 바는 내가 밥을 먹었던 곳에서 도보로 15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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