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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란 Jun 23. 2022

김씨의 덕질일기 10 : 옛 덕질과 인간관계

♪NCT DREAM - 우리의 계절 (My Youth)



때때로 지나간 인연들을 생각한다.


일련의 사건으로 사이가 멀어져 버린 옛 단짝이나, 그렇게도 친했지만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조차 모르는 동창처럼. 특히 방 정리를 하다 옛날의 내가 담긴 편지와 사진을 발견할 때면 매번 망부석처럼 앉아 그때의 기억을 곱씹곤 한다.


편지 속 내 이름은 참 다양하더랬다. '효니'처럼 기본적인 별명부터 '울히액희'처럼 당시 유행했던 유머를 착실하게 반영한 호칭도 있다.


그중 심심찮게 보이며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 다름 아닌 '000여친', '000부인'과 같은 네이밍들. 이름들만 모아 놓고 보면 거의 세기의 팜파탈이다. 그 짧은 몇 년 사이 남편과 남자친구가 수없이 바뀌어있다.


그렇게 유치하고 시답잖은 내용에 피식거리다 문득 세월을 느낀다. 나는 지금 수많은 전(前)남자들과도, 편지를 써주었던 친구들과도 그때 같은 밀도를 유지하고 있지 않다.



생각보다 관계가 끊어지는 건 쉽다. 조금씩 나이가 쌓일 때마다 가장 분명하게 와닿는 사실이다. 고작 이렇게 끝날 인연이었던가 싶어 허망한 마음에 꾸역꾸역 애쓰던 시기도 있었지만 어느새 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다 불쑥 후회가 찾아온다. 좋은 인연이었다면 '더 노력해볼 걸', 나쁜 인연이었다면 '빨리 끝낼 걸'. 특히나 사회면에 등장하는 옛 오빠들의 이름을 볼 때면 하필 왜 그 사람에게 그다지도 많은 사랑과 돈과 시간을 쏟았는지, 내 추억을 더럽힌 것만 같은 그에게 원망하는 마음까지 든다.


그러나 한 전문가는 "그 사람은 당신에게 와서 제 몫을 하고 떠났을 뿐"이라 말했다. 그러고 보면 좋았든 나빴든 모든 인연은 나름의 흔적을 남겼다. 친구와 함께 연습했던 장기자랑은 여전한 나의 노래방 레퍼토리고, 십수 년 전 덕질을 위해 독학했던 포토샵은 든든한 배경지식이 되어 요긴하게 써먹고 있다. 아무런 감흥 없이 그의 생일이 들어간 비밀번호를 입력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것도 그들이 나에게 주고 떠난 '제 몫'이겠지. 그럼 된 거다. 후회는 더 이상 소용없다. 우리의 시간은 끝났으니 그저 새롭게 이어지는 나의 시간에 집중하면 된다.



이렇게 말은 해도 언젠간 또 다시 카톡 프로필을 기웃거리고, 밤마다 이불을 차고, 만약에 만약을 더하며 밤을 지새울 게 분명하다.


앞서 장황하게 늘어놓은 글은 그래서 확신보단 다짐에 가깝다. 이미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지나치지 못한 채 제자리를 서성이는 내가 잠깐 머물다 다시 걸어갈 수 있기를. 예전의 '우리'보다 지금 '우리'라 말할 수 있는 이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쏟을 수 있기를.


과거로 가득 찼던 머리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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