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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란 Dec 24. 2021

김씨의 덕질일기 3 : 네가 웃으면 나도 좋아

♪ 정세운 - Say Yes


"언니는 뜨기 전인 애들을 좋아하더라. 근데 꼭 1위할 쯤에 탈덕해. 왜 그래?"


동생은 내 특이한 취향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취향이라기보다는 본능적인 이끌림에 가깝지만, 나는 대개 '얘네는 뜰만한데 왜 안 뜨지?'에서 '얘네'를 좋아했다. 능력 좋고, 그룹의 경우 멤버간 합도 좋고, 노래도 좋은데 아직 한 방이 없는 애들.


남들이 엠블랙의 Oh Yeah를 흥얼거릴 때 비스트의 Bad Girl을 좋아했고, 유지애가 연습생도 아니던 시절 인피니트의 예능 <당신은 나의 오빠>를 즐겨봤다. 마마무가 대중픽이 되기 전 첫 팬미팅을 다녀왔으며, 세븐틴의 데뷔 초 팬싸에 응모했(지만 떨어졌)다. 현 최애 이전 가장 오래 진심을 다했던 덕질 상대는 지상파 1위까지 무려 1480일이 걸린 비투비였다. 나의 덕질은 마침내 그들이 1위라는 수식어가 지겨울 정도로 유명해졌고, 쏟아지는 이슈 속에서 자연스레 마음이 떠나갔다는 결말까지 똑같았다.


나는 타인의 감정에 약했다. 누가 울면 울고 웃으면 웃었다. 심지어 잔정은 또 많아서 누가 웃는 모습을 보면 10분 안에 호감이 생겼다. 신인 아이돌은 대개 PR을 위해 자체 리얼리티를 찍는데, 연예계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풋풋하고 어설픈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사람이 귀여워보이면 답이 없다더니 어쩌다 마주친 그 영상들은 결국 나를 입덕의 길로 이끌었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지 않으려 하면서도 결국 코가 꿰이는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데뷔를 위해 이 악물고 노력하는 모습이, 가는 길마다 크고 작게 이어지는 돌부리에 아파하는 모습이, 끝내 데뷔하고 나서도 더 큰 목표를 위해 쉬지 않고 달려야만 하는 모습이 마치 지금 여기 버둥대고 있는 나같아 마음이 쓰였다. 응원하고 싶었다.


꽤 복잡한 감정이 드는 덕질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유명해졌으면 싶어 사방팔방 홍보하다가도, 뒤늦게 반응이 오면 '왜 내가 말할 땐 몰라놓고 이제 와서 좋다 하지'라는 유치한 마음이 들었다. 영업왕과 홍대병의 그 어디쯤이랄까. 심지어 아예 무명은 또 아니라서 될 듯 안 될 듯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기 일쑤였다. 지칠 법도 한데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아서 놓질 못했다. 팬덤이 함께 프린세스 메이커를 하는 것만 같은 분위기도 한 몫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번 덕질은 더 초조했다. 왜? 왜 안 뜨지? 얘 되게 잘 하는데? 세상 사람들 얘 좀 봐주세요. 내 선택이니 언젠간 반드시 잘 될 거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면서도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아 속상했다. 어쩌면 예전보다 더 뚜렷하게 불안해진 내 현실을 이 친구에게 투영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네가 빨리 잘 되어야 해. 그래야 내가 희망을 가져.


그러다 Say Yes가 발매되었다. 마음의 중심을 흔드는 존재에 대한 외침이란다. 노래는 언제나 좋았으니 신나게 들어보는데 멜로디만 들리던 귀에 가사가 들어왔다.


다들 왜 이래 

내게 앞을 다투어 무얼 해야 한다고

난 좀 이래 

그냥 다 그렇다는 말은 와 닿지 않아


그러게. 난 왜 초조했을까 싶었다. 꼭 떠야 하나? 아니, 뜬다는 게 뭐지? 정해져있는 건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전전긍긍할 동안 그는 그만의 길을 다지고 있었다. 스스로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 하다 보니 그 중심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차곡차곡 실력을 쌓으면서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음악으로 꽉 채운 앨범도 만들어냈다. 작게만 느껴졌던 하나하나가 예상 외의 파급(?)도 일으켰다. (정글 갔다가 엉너눈으로 불리게 될 줄은 몰랐지..)


당장 눈에 보이는 무언가만 좇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입버릇처럼 "쓸모 없는 경험은 없다"고 말해왔으면서 정작 내가 못 믿었던 거다. 그제서야 내 중심이 보였다. 제법 멋진 모양새를 꾸려가고 있었다. 아직 시계추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지만 벗어나지는 않을, 나만이 움직일 수 있는 궤도도 만들어냈다. 나조차 모르던 시간동안 조용히 성장해왔을 스스로에게 미안했다. 그래. 내가 웃으면 나도 좋으니까. 내가 나를 선택했으니까 나도 잘 될 거야. 그냥 그렇게 스스로를 덕질하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생각했다.


예전에도 그랬듯 어느 순간 멀어질지 모른다. 그가 범접할 수 없이 대단한 슈퍼스타가 되어서, 내 현생이 어마무시하게 바빠져서, 혹은 어쩌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래도 이 노래만큼은 종종 찾아들을 것 같다. 혹시나 나중에, 비로소 내 중심이 확실해졌을 때 그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꼭 말해야겠다. 나에게 단단한 뿌리를 길러주어서 고맙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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