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받았더니 엄마였다. 쾌활하지만 물기있는 목소리였다. 애써 밝아 보이려는 것처럼.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대뜸 미안하다 하는게 아닌가.
'미안해. 내가 애미가 돼서 미안허네'
엄마가 미안하다고 한 적은 몇 번 있었는데, 대부분 아버지의 난동과 관련이 있었다. 도대체 이해 할 수 없는 (물론 하기도 싫은) 성격을 가진 내 아버지는 주기적으로 술을 퍼마시고 집안을 박살내곤 했다. (말 그대로 부쉈다. 아 물론 때리기도 많이 했다.) 이 이야기들은 너무 흥미진진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제대로 소개할 수 있는 다음 기회를 기약해보도록 하자.
아버지발 폭풍이 한차례 난리가 지나고 나면 엄마는 난장판이 된 집을 추스리며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곤 했다. 그럴때 난 처음엔 '엄마가 뭐가 미안하냐'며 울었는데, 익숙해지고 나서는 '그러니까 이혼을 했으야지!'라며 농이나 따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 미안하다고 하니, 자라와 솥뚜껑 말마따나 '이번엔 아버지가 얼마나 난리를 쳤길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버지가 알게된다면 '자식 새끼 키워봐야 아무 소용 없다.'며 분개할 지도 모르는 일지만 어쩔 수 없다. 아버지의 난동은 충분히 개연성이 차고 넘치는 일이니까.
'어저께 다라에 물 받어 목욕을 하는디, 물이 음칭이 뜨겁더라.'
우리집은 욕조가 없다. 빨간 고무다라에 물을 받아서 바가지로 퍼서 쓰는데, 목욕을 해야 하는날이면 엄마는 평소보다 조금 더 큰 고무다라에 뜨거운 물을 받았다. 손으로 온도를 대충 맞추고 그안에 나를 집어 넣었는데 정말이지 지옥불마냥 뜨거웠다. 건조한 피부일까, 살갗이 따가운 느낌 마저 들었다.
'손으로 보는거랑은 다르드라. 니가 맨날 엄마는 어른이고 나는 애니까 뜨거운게 다르다고 소리를 쳤는데, 야 니말이 맞지. 나도 뜨거운디 어린 너는 얼매나 뜨거웠겄냐.'
왈칵했다. 젤리뽀 뚜껑을 열 때 젤리가 튀어나오려는 것처럼. 뜨신밥 먹고 할 일이 없어 이런걸로 전화하냐 타박했지만, 미안해 할 일은 하나도 없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