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우리는 하늘 호수를 여행하기로 했다.
휘파람과 함께 부르는 노래처럼 아주 멀리까지 가보고 싶었다. 80개의 책상과 옷장이 빼곡히 들어선 고등학교 기숙사 방바닥에 주저앉아서, 우린 대학생이 되면 떠날 여행을 이야기했다. 캐나다의 오로라를, 남극의 빙하를, 프랑스의 에펠탑을. 우리가 내린 결론은 '인도'였다. 판단의 근거는 한 권의 책이었는데, 류시화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이었다. (정작 우리가 겪은 인도는 그 책과는 전혀 달랐기에 순 거짓말만 뿐이었다고 투덜댔지만) 그땐 대학생이 인도에 간다는 건 매우 합당한 결론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늘 호수를 여행하기로 했다.
1학년의 여름에 내 친구 프랑켄은 대뜸 전화를 해서는 인도에 가자고 했다. 그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길 때가 되었다면서. 그의 논리는 단순했지만 설득력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1. 우린 이미 하늘 호수에 가기로 다짐을 했었다.
2. 다행히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친구인 '말미잘'이 인도 뉴델리의 대학에 진학했다!
3. 이때가 아니면 우리 그날의 다짐을 어찌 행할 수 있겠는가.
이 정도로 훌륭한 논리를 들고 나온다면, 당장 수락해야 하는 것이 사나이다. 말미잘에게 접선을 시도했는데, 그 결과 우리는 그의 부모님이 보내는 짐을 그에게 가져다주고, 그는 우리의 여행을 가이드해주는 이른바 '뉴델리 협정'이 맺어졌다.
동행은 프랑켄과 말미잘이다. 일정은 말미잘이 마련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행의 3요소 중 남은 것은 돈이다. 아버지에게 전화해 사정을 말했다. 아버지는 '그럼 네 동생도 데려가라.' 했는데 심장이 덜컥했다. 친구들과 떠나는 여행이라 신나 있었는데 혹을 얻어 붙인 기분이었다. 분위기가 어색할 거라는 둥 동생 공부에 방해될 거라는 둥의 이런저런 핑계를 늘어놨다. 아버지는 막무가내로 두 명분의 비행기 삯을 부쳐줬다. 물론 난 그 돈으로 유용하게 혼자 다녀왔다. 동생아 이제야 말하지만 사실 난 그냥 친구들하고만 가고 싶었다. 이렇게 동생에게 미안해할 거리를 또 하나 발굴하다니. 조만간 '전국 쏘리 자랑'을 열어서 미안한 이들에게 사과를 하러 가야겠다.
프랑켄과 함께 동대문엘 가서 배낭을 샀다. 애초에 캐리어는 고려조차 하지 않았는데, 움직이기에 배낭이 훨씬 편하기도 하거니와 배낭여행에 캐리어를 끌고 간다는 건 말 그대로 모순이기 때문이었다. 출발하는 날 새벽에 짐을 쌌다. 훗날 빠리, 헬싱키, 도쿄, 삿포로, 오사카를 함께 하게 될 배낭에 여행을 떠난다면 응당 챙겨야 할 것들을 넣었다. 노트와 필기구, 여분의 옷, 세면도구를 넣고 나니 자리가 남아서 기숙사 침대 시트를 개켜 넣었다. 배낭은 소매치기당하기 십상이라 하여 함께 산 힙쌕에 여권을 챙겨 넣으며, 인도 비자를 받던 날을 이야기했다. 대사관에 직접 가서 비자를 받아야만 했다. 대사관 현관을 넘을 때만 해도 여행이 와 닿지 않았었는데, 철창 너머 인도인에게 비자를 발급받자니 우리가 인도에 간다는 게 실감이 났다. 겨우 한남동 길거리에서 우린 벌써 세상을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큰 일을 마무리 지을 때면, 파티를 하는 것이 예의다. 우리는 예의 바른 청년이었으니 대사관 근처 토스트 노점에서 자축의 토스트를 먹기로 했다. 파티엔 미녀가 법칙이니만큼 토스트 누나는 정말 예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