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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없는 인도 여행기 #2

싱가폴을 건너서 뉴델리 까지.

by 김고양

예나 지금이나 돈이 별로 없다. 따라서 인천을 출발해 싱가폴을 경유해 뉴델리까지 가는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싱가폴항공이었는데, 해외여행이 처음이었던 나에겐 충분히 좋은 비행기였다. 기왕 경유를 할 거면 경유지를 한 번 둘러보고 싶어 23시간을 경유하는 일정을 골랐다. 여기까지는 스마트한 여행자의 일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한 가지 큰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싱가폴의 일정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거기엔 숙소도 포함되었다.


공항에 도착하니 이미 날은 어둑해지고도 한참을 지났다. 밤 9시에 공항에 달랑 떨어진 우리는 문득 겁이 났다. 안전한 공항에서 노숙을 할까 무서워도 밖으로 나가 볼 것인가. 우리는 무턱대고 공항 인포메이션 누나에게 갔다. '우리는 이번이 첫 여행인데, 숙소도 교통도 일정도 하나도 모르겠다. 도와주세요!'라는 말을 떠듬떠듬 영어로 말했다. 다행히 누나는 정말 친절해서, 저렴한 게스트하우스에 전화를 걸어 방을 알아봐줬다. 다행히도 사장님이 우리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누나가 적어준 게스트하우스 주소 쪽지를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에는 싱가폴 시티투어 팜플릿을 들고 택시를 탔다.


사장님의 이름은 앤디였다. 게스트 하우스 앞 파라솔 테이블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싱가폴에 온 걸 환영한다며, 우리에게 술을 한잔 사겠다고 했다. 앤디와 필리핀 손님 한 명 그리고 우리 둘은 야밤에 맥주를 먹었다. 영어를 못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없었지만, 여행의 정취를 느끼기엔 충분했다. 호주 태생인 그는 여행을 너무 좋아해 싱가폴에서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한다고 했다. 싱가폴에서 돈을 벌어 세계 곳곳에 놀러 간다고. 살아가는 방법은 충분히 많구나. 아직 삶의 문턱에 선 나이였지만 그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싱가폴에서의 하루는 밤의 맥주와 낮의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얀 음료로 요약할 수 있다. 숙소 앞 가게에서 팔았는데, 하얗고 맑은 액체에 보리 같은 알갱이가 포함된 것이었다. 생긴 건 꼭 식혜였는데 맛은 전혀 달랐다. 상큼하지만 가볍지 않았다. 역시 겉모습으로만 판단하기엔 난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걸 깨달으며 빨대를 쭉쭉 빨아제꼈다. 시티투어버스를 타고 한바퀴 둘러보고는 우리는 다시 인도로 향했다.


4.jpg 앤디의 게스트 하우스 앞에서 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얀 음료다.


공항엔 말미잘이 마중 나와 있었다. 그의 부모님이 보낸 짐을 한 보따리 말미 잘네 집으로 옮기고 나서, 그는 우리를 '빠하르 간지'로 인도했다. 뉴델리의 여행자 거리였는데, 뉴델리 역 근처였다. 환전을 하고 잠시 거리를 둘러보기로 했다. 영어도 힌디어도 못하는 우리는 병아리처럼 말미잘을 따라다닐 뿐 이었다. 길가의 수많은 노점을 보면서 입맛 다시고 있었는데, 무턱대고 먹으면 설사병 나기 십상이라 했다. 그러곤 '에삐'를 하나씩 사줬다. 네모난 팩에 빨대를 꽂아 먹는 주스였는데, 더운 날씨에 말 그대로 꿀맛이라 우리는 매일 '에삐'를 먹자고 졸랐다.


인도는 어딜 가도 카레 냄새가 났다. 풍경도 사람도 한국과는 너무 다른 곳 이었는데, 그 카레 냄새가 가장 인도다웠다. 인도의 아이덴티티는 공간을 가득 채운 카레 냄새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해 질 녘의 빠하르 간지를 뒤로하고 릭샤를 탔다. 내일은 북인도로 가기로 했다.


9.jpg 아마 빠하르 간지의 사진인 것 같지만 확신 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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