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하지 않은 것을 책임지는 삶

미셸 오바마 <비커밍>

by 하나김

미셸 오바마의 책 <비커밍>은 딱 한 달 만에 다 읽었다. 읽기가 어렵거나 재미가 없어서 오래 걸린 게 아니었다. 문장 하나하나가 너무 좋아서.. 읽은 페이지를 또 읽다가 그랬다. 이렇게 곱씹으며 읽은 자서전은 <비커밍>이 유일한 것 같다. 보통 자서전은 보여 주고 싶은 모습만 편집한 위인전이거나 자기 인생의 드라마를 과장한 (나쁜 의미에서의) 소설인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어느 쪽도 아니다.


나에게 이 책은 소수자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여 나가는 이야기였다. 여성, 흑인, 그리고 미국 대통령인 남편 같은 자신의 조건을 받아들이고 살아나가는 이야기로 읽었다. 대학 때 도서관에서 마돈나 평전을 읽었었는데, 거기서 마돈나가 했던 말이 이 책의 주제나 다름없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 나에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미셸은 그렇게 한다. 여성으로서, 흑인으로서, 퍼스트레이디로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나선다.


책은 세 개의 챕터로 나뉘어 있다. '내가 되다' , '우리가 되다' , '그 이상이 되다'. 첫 장은 가난하지만 따뜻하고 현명한 부모님 밑에서 사랑받으며 자란 똑똑한 흑인 소녀가 어떻게 스스로의 정체성을 믿고 받아들이게 되는지를 이야기하다가... 버락 오바마를 만나 키스하는 장면에서 끝난다. (미드와 같은 드라마틱한 편집;) 두 번째 장은 버락과 함께 가족을 꾸리고, 일하는 엄마로 분투하다 퍼스트레이디가 되는 과정을 그렸다. 마지막 장은 대통령 재임 시절인데 '미셸다운' 퍼스트레이디가 되어 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12월 19일 뉴욕에서 열린 비커밍 북투어. 사라 제시카 파커가 사회를 봤다. 미셸이 이날 신은 발렌시아가 부츠는 엄청나게 화제가 됐다.


역시 좋은 글은 솔직함에서 나온다. 에둘러 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써 내려 간 문장들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그는 신선했고, 관습적이지 않았고, 희한하게 우아했다.


버락 오바마에 대한 묘사인데, 죄송하지만 저도 이렇게 생각했어요!!; 오바마 대통령을 볼 때마다 어떻게 저렇게 자유롭고 격의 없고 신선하면서도 진중하고 차분하고 우아할까? 생각했었는데. 브레이크 댄스 추면서 발레 하는 느낌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신 분. 미셸의 적확한 표현에 감탄했다.


우리는 물론 예전과 같은 사람들이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새롭게 씨름해야 할
새 이름표와 정체성이 생겼다. 그는 내 남편이었다. 나는 그의 아내였다.


미셸은 시종 '정체성'을 이야기한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수시로 묻고 답을 찾아 나가는 사람 같았다. 명문고에 진학했을 때, 프린스턴, 하버드, 로펌을 거칠 때에도 '사우스사이드'(미셸이 나고 자란 시카고의 동네) 출신에, 장애가 있는 노동자의 딸인, 흑인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끊임없이 생각한다.


내가 짊어진 역사가 역대 대통령이나 퍼스트레이디의 역사는 아니었다.


퍼스트레이디로서도 마찬가지였다. 백인, 남성의 세계인 워싱턴에서 흑인, 여성으로 존재감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미셸의 외모를 비하하고 성별이 의심스럽다는 얘기까지 나왔던 시절이었으니 더 그랬을 거다. 미셸은 정공법을 택했다. 진취적이고 적극적이고 늘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미셸 오바마라는 사람으로 무대에 섰다. 그림 같은 미소를 띠고 우아함이라는 직무를 수행하는 퍼스트레이디와는 달랐다. 백악관에 텃밭을 가꿔 채소 먹기 운동을 벌이고, '대학에 가라'는 제목의 랩을 만들어 진학을 포기하는 흑인 청소년들을 독려했다.


사우스사이드의 어린 내가 지금 미시간에 있는 너일 수도 있어!! 대학 가라. (가사 중)


독립적이고 열정적인 직업인으로 살고 싶었지만, 그러면서도 안정되고 희생적이고 겉보기에는 단조로운 듯 평범한 아내 및 어머니 역할에도 끌렸다.
정확히 어머니처럼 되고 싶으면서도 결코 어머니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미셸은 셰릴 샌드버그처럼 무너지지 말고 도전하고 또 도전하라! 고 외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양가적인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하버드 로스쿨 출신의 인재로서 성공한 직업인이 되고 싶다는 욕망, 따뜻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야기는 이른바 '성공한 여성'들에게서 들어 본 적이 없는 이야기다.



빈한한 가정에서 자란 소수자가 견고한 세상의 편견에 맞서 싸우는 일은 하버드 출신이라고 해서, 미국 퍼스트레이디라고 해서 쉬운 것이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는 더 어렵기도 하다) 그래서 미셸은 계속해서 나아간다. 다음 사람, 그다음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계속해서 성장하고 계속해서 질문한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되다'의 의미에 대해 미셸은 이렇게 말한다.

내게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어딘가에 다다르거나 어떤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 진화하는 방법, 더 나은 자신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과정이다.


에필로그에서 마주하게 되는 이 문장은 미셸의 '되어 가는 과정'을 들여다본 후라서 그런지 더 각별하게 느껴졌다. 문장만 보면 뻔한 얘기일 수 있지만, 책을 읽고 미셸이 실제로 저렇게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된 독자들에게는 울림이 클 것이다.


이 책은 나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미셸이 나의 멘토가 되어 주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읽고 싶었던 편안하고 따뜻한 문장들 속에 단단한 심지가 느껴져서 좋았다. '미국 퍼스트레이디'가 쓴 '두꺼운', '자기 얘기'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었는데 괜한 생각이었다.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쓰인 버락 오바마와의 연애담만 읽어도 가치(?)가 있다.


미국 멕시칸 요리 체인 '치폴레 Chipotle'를 치포틀.이라고 번역한 것만 빼면 다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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