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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지 Apr 12. 2024

23년 7월, 내 영어실력을 굳이 증명하다

다채로운 나와 내 삶을 위하여 7

   그래도 영어는 곧잘 하는 편이었다. 일단 언어 자체에 대한 흥미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영어로 된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감상했던지라, 듣는 귀는 어느 정도 트여있었다. 그리고 캐나다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면서 영어는 자신감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딱히 내가 영어를 잘한다는 것을 증명해 남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곧잘 하니까.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고, 영어를 잘한다면 영어를 잘한다는 내용의 증명이 있어야만 영어를 잘한다고 인정해 주는 사회였다. 정말 팍팍하다.


   나는 이직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런 증명 한 줄이 소중해진 상태였다. 더구나 내가 영어를 못하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나는 영어를 곧잘 하는 사람이라서 너무 아쉬웠다. 나, 영어 잘한다고!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 내 영어 실력을 증명해야 했다. 그렇지만 문법 공부를 따로 하고 싶지는 않고,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토익스피킹이었다.

   무엇보다 토익스피킹 자격증 시험 응시료가 회사에서 지원된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의 열의는 더 타올랐다. 바로 토익스피킹 자격증 책을 주문하고, 주말 토익스피킹 강습반을 등록했다. 때는 뜨거운 여름 7월이었고, 나는 매번 손풍기를 들고 강남과 집을 오갔다.




   나의 영어실력을 증명하는 것이 이렇게나 어려운 일인지 몰랐다. 언어적으로 영어를 잘하는 것과 시험에서 내 언어를 뽐내는 것은 아주 다른 일이었다. ‘내가 가진 능력’과 ‘긴장으로 인한 일시적 바보 됨’의 격차를 줄이는 일이 이 시험의 관건이었다. 아무리 연습 때 기깔나게 영어를 뿜어대도 실제 시험에서 절어버리면 그게 곧 내 실력이 되는 냉정한 시험이었다.


   영화나 드라마를 영어자막으로 보거나 이미 시청했던 한국 드라마에 영어 자막을 틀어놓고 보는 것을 제외하고, 영어 공부다운 공부를 하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서 조금 헤맸다. 더구나 이미 알던 영단어도 미세하게 틀리게 알고 있었고, 새로운 영단어(특히 일상에 밀접한 명사)들을 암기하는 것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유아차… 내가 유아차를 영단어로 써야만 하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지만 토익스피킹 시험에는 있다. 왜냐하면 사진 묘사 파트의 사진에 종종 출몰하기 때문이다. 너무 대놓고 있는데 묘사하지 않으면 감점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스피킹 시험이다 보니, 일방적으로 수업을 듣는 것 외에도 내 스스로 배움을 입 밖으로 확인하는 절차가 꼭! 필요했고, 그래서 수업 전 스터디를 신청했다. ‘스피킹’인데 나 혼자 ‘스피킹’을 하면 실제 시험과의 유사성이 좀 떨어진다는 생각에서였다.

  스터디는 전 수업에서 배운 파트의 연습문제를 함께 해결하고 숙제를 재점검하는 시간이었다. 연음이나 단어의 강세를 다시 확인하고 자연스럽게 갈고닦았다. 확실히 혼자 숙제로 하는 것보다 함께 스터디로 연습문제를 제한시간을 칼 같이 지켜가며 문제를 풀자, 더 어버버 하는 나 자신을 느꼈고 역시나 공부는 끝이 없다는 것 역시 깨달았다.


   그래도 묘하게 뿌듯하고 기세등등한 감정이 있었다. 내가 문제집을 챙겨 들고 다니며, 영어를 중얼거리고, 영단어를 외우고, 영사전의 발음을 반복해서 듣고 따라 하고, 연습문제 수량이 점점 줄어들고, 하는 일들이 나의 자존감을 올렸다. 내가 이렇게나 열심히 하고 있고, 내가 나를 올바르게 채우고 있다는 감각이었다.

   ‘캬, 주말에도 영어공부를 위해 강남 한복판에 가서 공부하고, 딴 길 안 새고 바로 집으로 돌아오는 직장인이라니, 진짜 갓생이다.’라는 모종의 우월감과 지적허영심이 뻐렁쳤다.




   단도직입적으로 결과만 이야기하자면, 내가 원하는 결과는 간발의 차로 얻지 못했다. 내 목표성적은 AL이었는데, IH를 받았다. 아무래도 시험에서 너무 긴장한 나머지, 전 질문에 한 대답을 다음 질문에 대답으로 30% 가량 활용한 게 마이너스로 작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뭐, 사람이 긴장해서 그런 건데 뭐 어떡해.. 그렇다고 이 과정을 반복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10점 차이라 진짜 너무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결과를 얻어낸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결과를 얻어내는 과정 안에서 지식뿐만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충전됨을 느꼈으니까, 소기의 목적은 이미 달성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이런 나의 언어 열정은 일회성으로 끝나기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디 한 번 꾸준히 해봐? 지금까지 한 거, 까먹으면 좀 아까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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