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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볼 브리야 Jun 07. 2021

아쉬움이 없는 여행_멕시코 산 루이스 포토시

생각보다 꽤 괜찮다. 외로움도 잘 타고 자주 초조해서 약간의 불면증도 앓고 있는데, 혼자서 나름 잘 지낸다. 갑작스럽게 잡힌 회사 휴일에 근방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저번에 다녀온 떼끼스끼아판(Tequisquiapan)이 참 좋아서 다시 갈까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번엔 3일이나 주어졌으니 다른 곳으로 가기로 했다. 


바닷가에 갈까 하다가 그래도 물놀이는 친구들이랑 가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아 조용한 동네로 정했다. 산 루이스 포토시(San Luis Potosí)로 간다.


지금 사는 곳은 택시 잡기가 힘들다. 이전에 우버가 40분 넘게 안 잡히는 바람에 아침 일곱시에 출발하는 멕시코시티 버스 표를 놓칠 뻔한 적 있었다. 그날 우버 기사에게 오늘 와줘서 정말 고맙다고 하자, 버스 말고 카풀앱인 블라블라카앱을 이용하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그럼 이동하기 훨씬 쉬울 거라고.


지금 사는 곳에서 터미널까지 우버 270페소, 멕시코시티 가는 버스 325페소를 합치면 약 600페소인데 블라블라카는 170페소면 된다. 다음에는 그렇게 가보겠다 대답했는데, 이번 여행을 계획하면서 그 앱이 불현듯 생각났다.  


그래서 그 전날 여행을 예약했다. 33살의 운전자는 로봇 다루는 일을 하며, 께레따로에서 일을 하다가 금요일엔 SLP로 가서 대학교에서 강의를 한다. 그 사람은 나 말고도 다른 한 사람을 더 태우기로 했다며, 근처 편의점에 가서 기다렸다. 사실 모르는 사람의 차를 탄다는 게 좀 무서워서 후기를 꼼꼼히 읽었다. 다수의 여자 이용자들이 그와 같이 여행했을 때 안전함을 느꼈다고 적었다. 처음에는 그 후기에 동의할 수 있었다. 


잠시 후 룰루라는 여성이 차에 올라탔다. 두 명의 자녀를 두고 있고 한국 가수인 BTS를 좋아해서 한국인인 나랑 같이 차에 탄 게 정말 신기하다고 했다. 


룰루는 께레따로에서 일했는데 결혼 후 자녀를 키우다 회사를 퇴직했다. 엔지니어를 전공했고, 자신의 일을 완벽하게 사랑했으나, 회사가 요구하는 시간대를 충실히 따르기란 어려웠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저녁 8시가 아닌 7시에 퇴근하다 보니 소위 ‘찍혀버렸고’ 직장 상사의 괴롭힘까지 더해져 일을 그만뒀다. 


여자 혼자 아이 둘을 키우기란 상당히 고된 일이다. 남편이랑은 결혼한 지 4년 후에 이혼했다. 몰랐는데, 멕시코에도 시집살이가 있었다. 그의 시어머니는 아침 6시에는 집에 커피향이 은은하게 나야 한다고 했단다. 처음에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 나중에 시간 지나니 아니란 걸 알았단다. 


그걸 듣던 카풀 운전자가 멕시코에는 아직 많은 마초가 있지만, 자기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기 친구는 부인이 자기 바지를 다림질하지 않아서 이혼했단다. 나는 그 순간 부인이 느꼈을 공포에 대해서 생각했다. 무언의 압박과 그를 이행하지 않았을 때 아마도 남편은 불같이 화를 냈겠지. 가장 안전해야 할 집이 의무와 이행 여부에 따른 압박과 징벌로 가득 찼을 때 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니다. 지옥이었겠지.


룰루와 카풀 운전자의 이야기를 번갈아 들으면서, 최근 읽은 ‘보이지 않는 여자들’이란 책을 떠올렸다. 룰루가 하는 이야기들은 책이 서술한 이야기들과 정확히 일치했다. 돌봄노동을 행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시간제 노동자로 일하며, 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이후 충분한 연금을 모으지 못해 노년기를 보장받지 못할 가능성이 큰. 


그래도 그 둘은 정말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멕시코시티에서 택시 타고 200페소 냈다가 거스름돈이 없다고 버티는 기사에게 100페소를 거슬러 받지 못한 이야기. 그러면서 역시 수도는 도둑놈들이 가득하다며 불평했다. 우리나라도 서울에선 눈 감으면 코 베어간다고 얘기하는데, 사람 사는 거 다 똑같구나.


산 루이스 포토시에 도착했는데 그 전날 비가 와서 꽤 추웠다. 짐 많을까 봐 가디건 안 챙겼는데. 오들오들 떨면서 호텔을 찾아갈까 하다가 먼저 아침부터 먹기로 했다. 트립어드바이저에서 본 곳인데 생각보다 조용하다. 앞 테이블은 생일초를 불었다. 나는 아이패드를 꺼내 조용히 책을 읽으며 커피, 엔칠라다, 당근 주스 등을 먹고 마셨다. 평일 내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얘기하니까 주말에는 이렇게 아무 말도 안 하는 시간이 참 좋다.


호텔에 가서 짐을 풀고 맥주를 마시러 테라스 바로 곧장 나왔다. 한 병은 기분 좋은 취기를 위해 빠르게 마신다. 몇 모금 되지 않는 한 병을 끝내고 흑맥주를 추가 주문했다. 함박웃음이 절로 나온다. 노트북을 켜 혼자 열심히 글을 썼다. 안주는 따로 시키지 않았다. 산 루이스 포토시 특유의 수제 맥주가 모든 걸 대신했다. 


앳된 얼굴의 종업원에게 맥주를 추천받았는데, 그가 쭈뼛거리며 다가오더니 대뜸 팔찌 좋아하냐고 묻는다. 응 좋아하지. 그럼 팔찌 선물해도 돼? 하더니 빨간색 팔찌를 건네준다. 눈이 달린 장식품은 멕시코에선 보호하는 의미를 지닌다며, 항상 조심하란다. 이직한 곳이 조금 위험한 곳이라, 일하면서도 걱정되는 마음이 한켠에 계속 있었기에 선물이 참 반갑고 고마웠다.


술을 마시고 또 연거푸 몇 잔 더 들이키다가 집에 왔다. 원래는 10시면 자는데 오늘은 12시 반까지 깨어있었구나.  


그 다음날은 일찍 일어나서 El Mexico de Frida라는 곳으로 향했다. 아침 먹기 좋은 곳이라는 말에 그 곳으로 향했다. 한입 베어 물 때마다 새로운 맛의 향연이라는 후기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조용하고 아늑한 동네에 위치한 그곳이 좋았다. 공기는 쌀쌀한데 햇볕은 따갑게 내리쬐어 바깥에 앉았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조금씩 다 시켜보기로 했다. 여기에서 가장 유명하다던 2인용 메뉴는 모든 음식이 조금씩 다 나온다. 


Cáscaras de papa는 약 1.5cm로 썬 감자에 시큼한 크림을 올린 요리였다. Jalapeños rellenos de queso는 약간 매운 고추에 치즈를 가득 채워 튀긴 음식이었다. 옥수수 또르띠야에 살사 로하를 가득 넣어 먹었다. Quesadillitas fritas, Enchiladas potosinas는 평범한 튀김이었는데 익숙치 않은 냄새가 올라와 그대로 두었다. Champiñones empanizados는 다 먹었다. 버섯 육즙이 팡팡 터지면서 튀김의 바삭함과 잘 어울렸다. Ostiones 44 Magnum는 멕시코는 굴을 이렇게 먹는구나 알게해준 요리였다. 길고 입구가 좁은 유리잔에 굴 3~4개를 넣고 레몬과 칠리 등을 잔뜩 넣은 음식이었다.


다 먹은 요리는 버섯 튀김과 고추 치즈 튀김이었다. 배가 잔뜩 불렀다. 아쉬움이 남지 않았다. 입에 맞는 음식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고, 만약 몇 가지만 골라 먹었다면 나중에도 계속 생각났겠지. 적어도 후회는 안 남는 선택이었다. 


굳이 무엇을 하려 애쓰지 않아도, 혼자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고 먹고 싶은 것을 잘 먹고 책을 계속해서 읽어 나가면 괜찮다. 나는 그런 사소한 디테일에 행복해진다.


카페 가서 다시 글을 쓰는데 건너편 테이블에 앉은 사람이 흘끔흘끔 쳐다보다가 어쩔 땐 대놓고 본다. 무얼 하는 걸까. 스케치북에 나를 그리고 있는 듯했다. 다 끝냈는지 천천히 다가온다. 널 그렸는데 한번 볼래? 스케치한 그림은 인스타에 올리고 있는데 네 사진도 같이 찍어서 올려도 될까?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진다. 카페의 동그란 조명 아래에서 중단발의 사람이 노트북을 앞에 두고 열중한 그림이었다. 다른 사람 눈에 비친 내 모습이다. 


저녁에는 원래 가려던 아르헨티나 음식점을 지나쳐 택시에서 본 테라스가 근사한 곳으로 들어갔다. 아시아 음식을 파는 곳이었다. 사람이 꽤 많았다. 팟타이와 한국식 BBQ를 시켰다. 팟타이는 꽤 훌륭했으며, 돼지갈비는 미국식 스테이크 양념에 버무려져 잘게 썬 망고가 잔뜩 뿌려져 나왔다. 우리나라 망고 없어서 잘 못 먹는데... 정성스러운 요리를 천천히 음미하며, 여성과 표준화된 데이터 사이의 공백을 짚어내는 책을 읽었다. 


밖에 나와서 조금 산책을 하다가 우버를 불러서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 저녁 아홉시 멕시코 사람들은 가족 혹은 연인의 손을 잡고 나와 옥수수에 마요네즈를 바른 간식을 사 먹거나, 커피 한 잔,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을 들고 공원을 걷는다. 


문득 페루에서 처음 밤에 외출했을 때가 생각났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무서워서 해 질 녘에는 아무 데도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 해가 저물 무렵 리마의 한 공원으로 동전지갑을 샀다. 이름도 새겼다. 저녁에 나온다고 해도 모두가 무섭게 변하는 건 아니구나. 당연한 사실인데 그 당시의 나는 직접 모든 풍경을 마주한 다음에야 깨달았다. 


별생각이 다 든다, 읊조리며 두 바퀴 더 돈 다음에 우버를 탔다. 사실 그전에 저녁 먹으러 가기 전에 탔던 우버 기사는 동양인 손님을 예전에도 태워봤다며, 잠시 출장 온 일본인에게 14일간 각각 다른 창녀촌으로 데려갔다고 신나게 떠들어댔다. 그 더러운 일본인은 일만 하다가 가던가, 나까지 봉변이네, 싶다가 백미러로 흘끔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가는 기사가 더 성질났다. 


택시 기사는 앞에 있고, 나는 뒷좌석인데도 공기 안의 흐름을 바꿀 수가 없었다. 여긴 150페소부터 7,000페소까지 아주 다양하고, 콜롬비아 여자는 더 비싸. 목적지에 도착한 후에도 기사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프리카 여자도 있는데, 그 여자들은 멕시코 사람들이랑 결혼 안 한 대. 거기가 더 작아서. 여기까지 말하고 그는 아주 재밌는 농담이라는 얼굴을 하며 동의를 구하듯 고개를 쳐들었다. 


얼른 문을 열고 내렸다. 그 자리에서 벗어나 그냥 달렸다. 거기 갈 기분도 아니고 다른 골목으로 들어가 더 괜찮은 곳을 찾아 들어갔다. 기분이 상당히 더러웠다. 당신이 하는 말 불쾌하니 그만해달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내가 하는 말에 기분 상해 목적지를 확 틀어버리면 어떡하지 그런 조바심 때문이었다. 거절 잘하고 똑부러지게 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많이 부족하다.


어떡하지. 혼자 다니는 여행을 자제해야 되나. 그러다 문득 서울 고속버스터미널 근처 식당에서 본 시가 생각났다.  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봐라/ 내가/ 옷 사입나/ 술 사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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