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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출욕과 인정욕, '자랑질'의 맹점

우리는 왜 자랑을 할까. 무언가를 숨기지 못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by 김호빈
가을이 끝나간다.

숨겨야 산다. 대체로 인생이 그렇다. 내 연봉과 재력, 능력, 속마음, 뭐 이런 것들은 뽐내봤자 좋을 게 없다. 숨기지 못하거나 혹은 숨기지 않거나, 뒤에서 비웃음이나 사지 않으면 다행이다. "뭔데 같잖게 자랑질이야, 그 정도는 나도 벌어".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힘겨운 일상을 보내고 있는데 그건 내가 잘 숨기는 타입이 아니라서다. 특히 표정에는 모든 속마음이 드러난다.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지루하면 지루한 대로, 짜증나면 짜증난 대로, 내 얼굴은 모두에게 솔직하다. 내 입이 뭐라고 해명하든 당신이 추측한 내 기분이 대부분 맞다.


감정을 좀처럼 숨기지 못하는 내 고질적인 기질(?)은, 나와 비슷하게 어떤 것을 숨기지 못해 안달 난 사람들을 향해서도 마찬가지로 발현된다. 굳이 예로 들자면, 뭔데 같잖게 자랑질이야, 라는 말을 표정으로 표현하는 식이다.


며칠 전에는 동창 친구 한 명을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것이기도 하고 퇴사한 후에 처음 본 것이기도 해서 나는 겸사겸사 일을 그만둔 과정을 털어놓았다. 그 애는 "나는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퇴사는 못 하겠다"며 말을 딱 자르더니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온갖 자랑질을 해댔다. 본인 회사의 연봉과 복지는 어떻고, 다음 달에 호캉스를 가기로 했으며, 비싼 명품백을 하나 장만했다고, 마치 버티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하는 듯한 말을 내뱉는 것이었다. 나는 '힘들어서 퇴사한 사람'이고, 본인은 '힘들어도 버티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난 글에서도 말했다시피 나는 힘들어서 퇴사한 게 아니다. 그리고 물론 그 모든 것을 이 친구에게도 말했다.)


그 자랑들을 들으니 나는 힘들어서 퇴사한 사람이라는 오해를 굳이 해명하기 귀찮았다. 나의 퇴사 이야기를 저런 식으로 받아치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설명해도 못 알아들을 것 같았다. 말해봤자 입만 아플 것 같아서 나는 그냥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너보다 연봉 더 많이 받았어, 요즘에 호캉스 안 가본 사람도 있냐, 명품백은 나도 있어, 뭔데 같잖게 자랑질이야.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내 면모를 보여줬다.


천천히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것은 분출욕이다. 보여주고 싶은 욕구, 전시하고 싶은 욕구, 벗고 싶은 욕구. 이 엉뚱한 욕구는 능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수동적인 것에 가깝다. 보여지고 싶고, 전시되고 싶고, 벗겨지고 싶은, 수동적인 마음들.


그래서 분출욕은 인정욕의 또 다른 얼굴이다. 누가 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 누가 좀 인정해줬으면 하는 마음. 그렇다면 나는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들키고 싶어 했으며, 여전히 들키고 싶어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지금 이렇게 내 생각을 숨김없이 공유하는 것도 그런 마음일 수 있다. 아마 며칠 전 만난 그 친구도 나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그런 자랑을 했던 것일 테고.


분출욕 혹은 인정욕은 유독 우리 사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왜일까. 아마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다는 감정이 절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험 성적으로 줄을 세워 평가하고, 초봉은 최소 5000이라는 기준이 있으며, 부동산에는 남방한계선을 쌓는, 그런 엄격한 잣대가 무한대로 통용되는, '타인은 지옥'인 곳이니까.


그러니 그곳에서는 뭐 하나라도 갖거나 하나라도 이루면 자랑하고 싶어 안달 난 '똥 마려운 강아지' 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분출하고 싶어서, 인정받고 싶어서. 그게 연봉이 될 수도, A+의 성적이 될 수도, 부동산이 될 수도, 주식이 될 수도, 아니면 '힘들어도 버티는 내 모습'이 될 수도 있다. 다시 내 얘기로 돌아가자면, 표정을 좀체 숨기지 못하는 나는 딱히 내세울 게 없기에 감정을 생생하게 전시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 자랑질은 불가피하다. 온갖 잣대들이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평가 기준들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촘촘하게 모두를 겨누고 있는 곳에서, 뭐 하나라도 인정받아 소속감을 느끼고 싶은 욕구는 상상 이상이다.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니 숨기지 못해 터져 나오는 서로의 분출욕과 인정욕을 너그러이 받아주는 게 좋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어쩌면 가족의, 친구의, 애인의 자랑질을 모른 체하며 그냥 웃어주는 게 변화의 시작일 수 있으니. 그것은 또 우리 모두의 책임이기에 나는 자꾸 반성하고 또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주로 여행갈 때만 선글라스를 챙긴다. 마지막 여행이 지난 6월 하와이였으니 5개월은 방치돼 있던 셈이다. 선글라스를 꺼내게 된 유난히 가을볕이 따가웠던 날.

사실 이 모든 것은 오랜만에 선글라스를 쓰고 바깥을 돌아다니며 든 생각이다. 선글라스는 하루 종일 가감 없이 드러나는 내 얼굴의 표정과 감정을 모두 가려줬다. 그 덕분에 내 가방에 달린 하와이산 태닝키티를 조몰락 거리는 1호선의 어떤 할아버지를 감시할 수 있었고(너무 귀여워서 떼어갈 수도 있으니), 카페에서 가벼운 스킨십을 넘어 거의 섹스를 하는 커플을 대놓고 바라볼 수 있었다.(진짜 하면 신고하려고)


이런 감정들을 표정으로 마음껏 표출하고 또 선글라스에 의해 가려진 채, 숨기고 드러내는 행위는 무엇일까, 생각했다. 우리 사회는 대체로 숨기는 것을 강요하지만 동시에 드러내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다. 이런 것들을 곱씹다 보니 분출욕과 인정욕, 그리고 자랑질에 대한 생각까지 뻗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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