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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사람들을 위해

불안은 평생의 동반자, 당신도 불안에 떨고 있는가

by 김호빈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살아가면서 불안이라는 감정을 완전히 떨쳐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백 퍼센트 편안한 상태는 허구다. 평생 어느 정도 불안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게 내가 생각한 불안감에 대한 결론이다.


나는 사실 지금까지 매 순간 불안하다는 감정을 느끼며 살아왔음에도 그게 언젠가는 사라질 줄 알았다. 입시에 성공해 대학생이 되면, 취업에 성공해 직장인이 되면, 친구 사귀기에 성공해 인싸가 되면, 연애에 성공해 결혼을 하면, 불안이라는 감정은 눈 녹듯 사라지고 안정적인 상태로 접어들 줄 알았다. 백 퍼센트 편안한 상태로 말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불안감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평생 여러 행위를 하며 살아가는데 그게 뭐가 됐든 모든 활동에는 불안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생산활동을 하고, 생산활동을 하기 위한 준비(공부, 운동, 자기 관리 등)에도 힘을 쏟는다. 외로움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친구를 여럿 사귀거나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활동에서 불안감이 파생된다.


대학생은 학점과 취업을, 직장인을 실적 압박과 업무 스트레스를, 인싸는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을, 기혼자(나는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이것은 추측이다.)는 육아와 영원한 사랑에 대한 고민, 등을 갖는다. 또 7년째 장기연애 중인 커플에게는 권태감이, 먼바다에서 오징어를 잡는 어업인에게는 당장 오늘 밤의 파도가, 자급자족하는 농업인에게는 변화무쌍한 기후위기가 장애물이다. 결국 입시와 취업, 사랑, 결혼 등 온갖 미션에 성공해도 그다음 단계의 불안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완벽주의적 성향을 가진 나는 어렸을 때부터 유독 불안감이 싫었다. 이 감정을 통제해 완벽하게 편안한 상태에 이르고 싶었다.


그래서 고등학생 때는 대학교 입시로 인한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수능 공부에 매진했다. 하루에 10시간 이상 공부해 대학생이 되면 불안감이 사라질 줄 알았다. 그렇게 원하는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불안감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취업 불안이라는 것이 새롭게 나타났는데 나는 이것을 또 해치우기 위해 진로 탐색과 동아리, 학회 등 온갖 활동을 전전했다. 취업만 하면 불안감이 사라지고 편안해지겠지, 생각하며.


브라보 김호빈! 기자가 됐다. 그런데 취업 후에도 내 앞에는 또 다른 불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종종 미래에 대한 불안까지 느꼈다. 아마 먼 훗날 결혼을 하게 되면 새로운 불안이 엄습하겠지.(앞서 말했듯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이것은 추측이다.) 결국 불안은 서로 다른 모습을 한 채 인생의 굴곡 곳곳에서 나타날 것이다. 끊임없이, 그리고 끈질기게.


평생 불안에 떨며 살아야 한다니, 완벽한 안정감의 상태로 접어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니, 참으로 암울하고 비관적이다. 지금껏 나는 내가 느끼는 불안감을 안정감으로 완전히 대체하기 위해, 안정적이고 편안한 삶을 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는데 말이다. 조금은 억울한 마음이 들어 그 이유에 대해 곰곰 생각해 봤다.


불안이라는 감정은 유독 우리나라에서 심하다. 표면적으로 보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항상 무언가에 쫓기듯 급급하게 일상을 보낸다. 스트레스를 만성적으로 달고 살며 정신과 진료는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인터넷과 같은 익명의 세계에서는 남을 헐뜯는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배설하는 사람들이 넘친다. 대마초 같은 마약이나 사이비 종교, 무속 신앙 등이 전례 없이 횡행하는 것도 모두 각자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한국인의 다급함은 불안감의 표출이다. 이 같은 특유의 조급함은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니다. 해방과 분단, 그리고 전쟁을 겪은 후 급격한 산업화와 경제 성장 등을 거치며 발흥했다. 우리나라는 북한과의 체제 경쟁 속에서 산업화를 '빨리빨리' 이뤄야 했으며, 세계적으로 뒤처진 산업들을 정부 지원을 통해 '빨리빨리' 키워야 했다. 반백년 동안 산업화와 경제 성장이 진행되는 동안 불안감에 기반한 다급함이 빨리빨리 문화로 정착된 것이다. 해외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한국이 진짜 급한 사회구나, 나도 좀 여유롭게 살고 싶다"


왜 우리는 매 순간 조급하고 불안할까. 경쟁자를 밟고 올라서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고, 실패는 죄악시되며, 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 승자독식 사회라서다. 또 새로운 길보다 관성적인 루트를 권장하고, 도전에는 응원보다 만류를 먼저 하는 사회라서다. 1등이 아니거나 정해진 경로로 가지 않으면 패배자로 낙인찍히는 곳이니, 한 발자국이라도 잘못 디딜까 불안에 떠는 것이다. 저성장이 고착화하면서 점점 더 경쟁은 치열해지고 있으니 우리나라는 얼마 안 가 '불안 사회'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이미.


나 역시 지난해 말 정신과 진료를 위해 광화문 인근 병원을 수소문한 적이 있다. "기자들은 대부분 정신과 다닌다"는 동료 기자의 말을 듣고 용기를 냈다. 어렵게 전화를 걸었지만 향후 3개월 동안의 예약이 이미 완료돼 있었다. 인근의 다른 병원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3개월 뒤 진료일을 잡아 보려 했으나, 일개 직장인에게 미래를 예측해 진료 날짜를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심리적 문제의 기저에는 불안이 깔려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불안감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한다. 불안이라는 감정은 평생 피할 수 없으니 그 감정을 잘 컨트롤하고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안감을 0으로 만들 수 없고 완벽한 안정감이 허구라면, 인간은 불안과 편안의 농도를 조절해 가며 살아가야 한다. 너무 잠식되지 않게끔.


다행인 것은 모든 불안에는 그 시기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이 같은 시기적 특정성은 종종 그리움으로 연결되곤 하는데, 불안함 역시 돌아보면 그리워질 수 있다.


태권도 학원에 가기 싫어 칭얼거리던 8살 아이, 외대에 입학하고 싶어 매 순간 경쟁의 극한으로 내몰리던 19살 고등학생, 기자가 되고 싶지만 정확히 뭘 해야 할지 몰랐던 취준생, 업무 스트레스와 '화병'을 달고 사는 직장인, 권태로움과 영원한 사랑에 대해 의문이 생긴 장기연애 커플, 모두 그 시기에만 겪을 수 있는 감정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셈이다.


하이데거는 불안을 부정적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그는 불안을 '본래의 나'를 직시하는 통찰로 바라봤다. 불안 속에서 이처럼 소중한 감정을 찾고 그 마음을 기억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불안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소중하고 특이한 감정, 그때가 아니면 다시는 느낄 수 없는 감정, 일생에 한 번뿐인 감정을 촘촘하게 온몸에 새기며 살아가야겠다. 먼 훗날 지금을 돌아보면 그리워질 때가 있겠지,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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