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비워야 삶이 풍요로워지는 이유
잊는 게 힘이다. 아는 것보다 잊는 게 중요하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비워야 한다. 쌓이고 쌓인 기억 저장소를 비우고 비워야 풍족해질 수 있다. 비워야 비로소 풍요로워지는 역설. 이른바 '망각의 역설'이다.
인류는 잊었고 살아남았다. 망각의 동물인 인간은 끊임없이 비우도록 진화했다. 적당한 망각이 생존에 유리했을 것이라는 게 학계 주류의 설명이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정보를 영구적으로 저장하고 유지하려면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게다가 머릿속에 불필요한 정보들이 산재할 경우 중요한 정보를 분별하는 속도와 정확도 역시 떨어질 수 있다. 그러니까 망각이 곧 생존이었던 셈이다.
이를테면 동굴을 나와서 5분 정도 산책을 즐기다가 거대한 매머드의 뒷모습을 발견했다고 상상해 보자. 우리의 뇌는 즉시 생각하고 판단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도망가야 할까, 쫓아온다면 어디에 숨는 게 좋을까, 맞서 싸우면 이길 확률이 있을까. 나는 최대한 소리를 죽인 채 왔던 길을 사뿐사뿐 되돌아가는 최선의 선택을 한다. 만약 뇌 속에 정보가 너무 많았다면 최선의 선택을 결정하는 데 시간이 오래 들거나 심각한 경우 오판을 내렸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주먹도끼를 들고 매머드에게 먼저 시비를 건다든지...)
그런데 나에게는 이처럼 30만 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현생 인류 진화의 결과물을 거부하는 버릇이 있다. 모든 경험과 감정, 사소한 말, 눈빛, 이런 것들을 평생 기억하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다. 망각하고 싶지 않기에 나는 집안 곳곳에 붙여 둔 메모장이나 오래된 일기장, 책 귀퉁이 등 온갖 곳에 끄적인다. 향긋한 다크초콜릿처럼 필요할 때마다 꺼내 먹을 수 있도록.
이유는 간단하다. 경험주의자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경험의 결과물이 바로 기억이라고 생각한다. 기억이 나야 비로소 경험했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그 기억을 잊는 것은 곧 경험을 잃는 것이 되기에, 진정한 경험주의자로 거듭나기 위해 기억을 새기고 또 새기는 것이다. 놀이기구를 탔다면 그때의 느낌을, 사랑을 했다면 그때의 감정을, 아침 운동을 했다면 그때의 기분을,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망각을 거스르기 위한 발버둥.
모든 것을 기억하려고 애쓰다 보면 힘겨울 때가 있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새로운 정보를 배우고 익혀야 하는 순간이다. 나는 가끔 무언가를 배우는 데 있어서 남들보다 조금씩 느리다. 뇌의 용량은 제한돼 있는데 좀체 비우질 않으니 새로운 정보가 들어설 공간이 부족했기 때문일 테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물론 대부분은 반복 학습으로 극복했다.) 이 밖에도 가끔 생각이 지나치게 많아지기도, 상념에 잠기기도, 의사결정에는 하세월이 걸리기도, 자주 우울감이나 권태감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오랫동안 이러한 습관을 가지고 살았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니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도 모두 나와 비슷한 증상을 겪고 있는 듯하다. 모두 끊임없이 기록하고 기억하려 하기 때문이다. 즉 대부분은 무언가를 망각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더 정확히는 무언가를 잊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는 휴대폰만 열어 봐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블로그 등을 통해 망각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오늘 먹은 음식이나 입은 옷, 읽은 책, 방문한 카페 등 일거수일투족을 업로드함으로써 그 순간의 감정과 경험을 영구히 기억한다. 정보의 홍수.
문제는 정보가 넘쳐나지만 좀처럼 잊어버리지 않기에 정작 받아들일 수 있는 용량 자체는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서로의 생각과 사유가 섞일 기회는 사라지고 그 대신 높은 울타리가 들어선다. 그 사이 똑똑한 알고리즘은 확증편향을 부추긴다. 결국 서로 의견을 나누는 과정 자체를 거부한다. 나와 다른 생각에는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다. "나는 나의 것을 기록하고 기억할 테니, 너는 너의 것을 기록하고 기억하라."
온라인에서는 "반박 시 네 말이 맞음"이라는 말이 흔히 쓰인다. 자신의 주장을 촤라락 펼친 뒤 마지막에 '띡'하고 한 줄 붙이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이 말은, 나는 너와 논쟁하고 싶지 않으니 각자의 길을 가자, 는 의미다. "내 생각은 이렇고, 너랑 피곤하게 토론까지 해서 내 생각을 바꿀 의향은 추호도 없어, 꺼져!"
그래서 우리는 의도적으로 잊어야 한다. 기억을 붙잡아두는 게 숨 쉬는 것처럼 쉽고 자연스러워진 세상에서, 타인의 정보를 위한 공간이 부족해진 세상에서, 소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모두가 진화를 거스르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비워야 한다. 물 흐르듯 잊고, 물 흐르듯 기억하고, 물 흐르듯 받아들이도록 말이다. 인생은 매 순간 비우고 또 채우고의 연속이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 잊는 게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