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 만의 첫 생일
엄마 돌아가시면 꼭 양력 생일을 쇠리라 다짐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나 태어난 날에 대해 감사나 기쁨보다 불만과 질투가 훨씬 더 많았다.
마흔다섯, 의료의 혜택이라곤 받을 수도 없는 시골에서 그 나이에 목숨 걸고 출산을 한다는 건 자식에 대한 욕심이나 용기보다 무지와 피임 실패에 대한 어쩔 수 없는 감당일 뿐이었을 것이다. 생산으로 치면 열 번째였고 아주 오래전 아들 둘에 딸 하나를 잃은 늙은 부모에게 남은 딸 다섯과 아들 하나가 남아 있었다. 혹시 아들이었으면 하는 간절함 정도는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결과적으로 나의 탄생은 그다지 환영받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엄마는 두고두고 나를 낳은 걸 천만다행으로 알았지만 나는 그야말로 다른 형제들보다 젊다는 하나로 감당해야 할 게 그만큼 많았다. 그나마 아주 못 돼 먹지는 않아서 효녀 소리는 좀 들었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억지스러운 면도 많았다. 그러므로 나는 효녀가 아니라 효년이었다.
그 시절 부모가 대부분 그렇듯 아들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은 집착이었고 그에 반해 내게 미치지 않는 사랑에 대한 갈증으로 나는 너무 외로운 아이였다.
어렸을 때 엄마 혼자 언니네 집에서 받은 생일상과 케이크를 나는 훗날 사진으로 보고 식구들이 미웠다. 자라면서 생일날 한 번도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엄마를 끔찍이 사랑하는 형제들은 같은 날인데도 내 존재를 늘 나중에나 떠올렸다. 엄마 생일 케이크의 초를 끄고 나서 재활용하는 초를 결코 불고 싶지 않았다. 왜 하필, 하고많은 날 중에 당신 생일날에 나를 낳았을까.
내 세 딸이 자라면서 내 생일을 챙기기 시작했다. 더 이상 서러울 이유가 없었다. 엄마 돌아가시면 내 생일은 음력 2월 27일이 아니라 양력 4월 3일이라고 내 가족에게 선포했다. 엄마 살아서는 엄마의 그늘이 싫었고 돌아가시면 또 엄마 생각이 더 날 것 같았다. 애들이 기억하기도 양력이 편하다 싶었다. 생일 변경의 이유는 충분했다.
그러나 막상 그럴 수 없었다. 나를 부정하는 것 같았다. 55년 동안 엄마 생일에 가려 있다가 이제야 오롯이 나 혼자 생일을 맞았다.
혼자 차지한 생일인데 기쁘지 않았고 우울했다. 짐작한 상황이었다. 아침에 동기간의 안부 전화에도 엄마 얘기가 먼저 나왔다. 어쩔 수 없는 운명 맞다.
엄마 돌아가신 지 일 년이 다 돼 간다. 슬픔은 장기 할부처럼 잊을만하면 한 번씩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