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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입문 Jun 29. 2024

서서 마시는 가쿠하이

하이볼 입문기 #1

퇴근하고 나서 하이볼이 한 잔 땡긴다. 혼자 마셔도 좋지만, 오늘 하루 전쟁을 함께한 동료와 마시고 싶다. 문제는 동료에게도 가족이 있고, 기다리는 이가 있다. 그렇다. 우리에겐 시간이 부족하다. 이럴 때 가쿠하이*를 마실만한 곳이 타치노미야*다.
*가쿠하이 : 기린의 가쿠빈 위스키를 넣은 하이볼의 준 말
*타치노미야 : 서서마시는 일본의 술 가게 


나는 회의시간을 짤막하게 잡는 걸 좋아하는데, 어쩐지 그렇게 우리의 '이별'을 미리 정해놓으면 회의시간 동안 집중이 더 잘 되었 던 것 같다. 특히 프로젝트를 하다 합이 잘 맞는 팀이랑 회의를 하게 되면 기이한 회의 시간(17분, 39분, 46분 뭐 이런?) 맞추고도 회의를 끝낼 수 있다. 기분 탓인지도 모르겠는데 이런 이상한 시간대를 맞추면 평소에 말 안 하던 사람도 회의 시간이 줄어드는 걸 보면서 급한 마음에 필요한 말들을 이것저것 빨리 꺼낸다. 그러다 보면 평소보다 이야기의 농도가 짙어지고, 깊어진다. 그렇게 39분! 기대했던 회의 목적을 달성하면 어쩐지 "아 미친! 우리가 끝냈어!" 하는 이상한 희열이 든다.(말해 놓고 보니 좀 이상하다) 


비슷한 맥락으로(?) 회식을 길지 않게 끝내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나에겐 12시쯤 되면 잠에 들고야 마는 기면증에 가까운 증상이 있다. 술을 마시든 마시지 않던 상관없이 잠이 온다. ('잠 온다'는 사투리이지만 이걸 차마 '졸리다'라고 표현할 수 없다. 정말 12시에 잠이 몰아쳐서 달려온다.) 기본적으로 몸이 12시엔 자고 6시엔 일어나게 되어있어서 밤을 잘 새진 못한다. 대신 귀신같이 6시엔 일어난다. 알람이 있건 없건 간에. 이런 이상한 패턴이 호주나 일본에선 참 잘 맞았다. 오후 3시부터 가게들이 닫는 곳이 있었으니까... 밤 9시 10시면 어지간한 술집도 문을 닫았다. 덕분에 애당초 12시 넘어 술을 마실 일이 잘 없었다. 일본에선 타치노미야가 있었다. 


일반적인 회식이 회의시간 4시간에 달하는 글로벌 지사 간의 지리멸렬한 회의랑 비슷하다면, 타치노미야는 39분에 끝내는 쌈박한 스타트업의 회의 같다.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 4시간이 달하도록 서로의 회의 자료를 읽어주는 정도 수준의 논의 밖에 하지 못한다. 그럴 바에 자료만 미리 주면 되지 회의를 왜 하나 싶다. 39분짜리는 회의는 발표 자료 하나 없어도 할 수 있다. 목적이 분명하다면 이야기 깊이는 4시간 회의보다 훨씬 깊다. 서로의 생각을 부딪혀 보고 확장하고 축소시킨다. 사고가 오고 간다는 느낌이 든다. 


내 기준에선 한국의 일반 회식이 이놈의 글로벌 회의랑 무척 비슷하다. 대체로 시끌벅적한 어딘가에 많은 이들이 모여서 1차를 가고 배를 채운다. 대화는 필요 없고 서로가 노래방을 가서 서로의 노래를 부른다. (당연히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틈은 없다) 그다음 3차와 4차를 끝이 없도록 마시며 달린다. 당연히 서로의 마시기만 할 뿐 대화가 없다. 나는 이런 회식에선 중간에 2차쯤 잠을 좀 자야 한다. 그래야 겨우 비몽사몽 하게 3차와 4차를 버틴다. 사실 졸려서 집중이 안 되거니와... 대화가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아서 이런 '회식'은 무슨 소용인가 싶다. 젊은 세대가 회식을 기피한다 수준이 아니라, 안 젊은 나도 기피하고 싶을 만큼 피곤하다.   


짧은 39분 스타일 회식은 개인적인 취향으론 할 만하다. 만두 한 접시 놓고 마시면 우리의 끝이 이 만두 5조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하이볼을 한 두 모금 마실 때마다 이 잔이 끝나면 집에 갈 시간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러니 좀 더 이 시간 동안 잠시나마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일을 하다 보면 느끼지만 내 주변의 동료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길 것 같이 느껴져도 의외로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린다. 


함께 하는 시간이 소중하다면 짧은 시간 동안 여러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많이 취하지 않더라도 중요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4시간, 아니 끝나지 않는 회식 시간을 통해 끌어낼 수 있는 이야기보다 39분 동안 끌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크게 다르지 않거나 더 많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유한함을 알기에 비록 서서 이야기해도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짧게 이야기하지만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서서 마시는 가쿠하이를 좋아한다. 교자집의 조그마한 접시 위, 5개의 만두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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