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돌보다 우는 내게 남편이 해준 말
9월 21일 시원하게 비가 왔고 바람이 선선해졌다. 제리와 함께 하천을 걷고 왔다.
제리는 아기를 메고 나는 백팩에 아기용품을 챙겨나갔다. 나뭇잎도 만지고 가을바람도 만끽하고 오리들도 봤다. 가을바람에 마음이 선선해진다. 내가 점점 괜찮아지는 게 느껴진다.
이전에는 감정 그래프가 예측할 틈도 없이 튀고 미친 듯이 오르락내리락했다면 지금은 바닥으로 꼬꾸라 질라치면 알아차리게 된다. 긴장과 불안으로 생각이 체한 듯이 잘 못 삼킬 때면 찬찬히 숨을 쉬고 몸에 힘을 뺀다.
제리와의 오늘 하루도 편한다.
몇 달간 긴장의 압력도가 매우 높았다. 나는 울었고 제리는 굳었다. 날이 서서 달려들었고 내가 힘들 땐 같이 힘들어 버리는 제리가 몹시나 서운했다.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면 좋겠는데.. 나 또한 내 맘을 잘 못 붙들고 있으면서 타인에게 바라니 서로 먼지싸움이다. 제리가 차가운 벽처럼 느껴진 날. 제리가 내게 말했다.
"허니 난 허니를 도울 수 없다. 지금 제일 중요한 건 허니가 허니를 챙기는 거야. 제발"
이 말이 심장을 저 밑으로 끌고 내려가 서운함이 가득하다. 힘들면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닌가?
마음이 찌그러져 미간이 뭉개진다. 뭐라고?
"진짜로 진짜 허니 인생을 살아. 아이 생각도 내 생각도 하지 말고 허니 인생을 살아"
범벅난리였다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다. 어? 그러고 보니까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나는 뭘 하는 건가? 나는 내게 어떤 사람인가?
"난 허니를 도울 수 없다. 네 인생 주인공은 너야. 네가 결정하고 해야 하지. 내가 어떻게 해줄 수가 없잖아"
맞는 말이다. 여유 없이 찌그러져 있다 보니까 들리는 말들도 내 멋대로 해석했었다. 그러네 내 시간을 지금 나는 어떻게 보내고 있는 거냐.. 아이는 4개월, 1년 같은 시간을 보냈다. 시간도 공간도 다 삼켜진 구슬픈 마음들을 즈려 밟아가며 살았다. 몸은 퍼지고 아프고 마음은 잠만 오던 그 시간들이 고작 4개월뿐이라고?
이제야 제리가 보낸다.
힘든 나를 어떻게든 부축하려고 하는데 날카로운 말들로 핡켜서 상처받은 제리가 보인다.
외로워서 흐려진 제리가 이제야 만져진다. 아이를 낳고 우리 관계는 많이 어색해졌다.
무슨 일이든 이겨내고 3년 동안 가고 싶은 나라가 생기면 바로 날아가 삶을 꾸렸던 우리가. 그 미국에서도 살아내고 각자 여행하면서 일할 수 있도록 시간을 설계했던 우리가. 터키에서 테러가 나서 두 손 잡고 영국으로 떠났던 우리가. 뭐든 다 할 수 있는 우리가 이렇게 돼버렸다.
나는 이해를 많이 바랬다. 아이를 낳았으니... 마음이 많이 우울하니.. 이게 산후 우울증이 될 수 있으니.
모유수유가 너무 힘드니. 이해를 바라면서 상대의 목줄을 끌어 잡아당겼다.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다.
우리는 하루 30분 동안 함께하는 시간을 갖자고 했다.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제리가 재택근무를 하니 항상 함께 있긴 하다. 그런데 되려 서로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을 갖지 못했다. 제리가 일하면 내가 아기를 재워야 하고 밥도 허겁지겁 먹고 아기를 내려놓고 자러 들어갔다. 빈 시간에는 서로 힘듦을 뱉어 던지기 바빴기 때문에 고맙고 애틋 한 마음을 건넬 여유가 없었다. 사랑하고 고마운 당연한 마음이 말로 전해지지 않으니 점점 빛이 바래져 갔다.
처음 30분 시간은 어색했다. 잠시 아이를 맡기고 카페를 갔다. 딱히 맘에 들지도 않고 케이크도 별로였으나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했다. 애써 하루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심상치 않은 눈빛이 보일 때는 또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참았다.
30분의 대화는 한 시간의 산책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10분의 농도 짙은 시간이 되기도 했다.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서로에게 고마웠던 것 한 가지를 이야기하기로 했다. 고맙고 좋은 게 뻔하고 당연한 거지만 더 드러내고 말을 해야 마음과 마음이 말랑해진다. 문자로도 고맙고 사랑한다고 적었다.
제리는 미국동부시간에 맞춰서 일을 해서 새벽 2시에 끝날 때가 많다. 아기를 힘겹게 재우고 지쳐 잠들 때가 많았는데 요즘엔 꼭 문자를 보내고 잔다. 물 마시러 나가는 길에 사무실방에 들러서 윙크를 보내기도 했다. 같은 집에 있어도 시간을 짜내서 마음을 문자로 보냈다. 완전히 우리 관계가 쫜득찹쌀사랑퐁퐁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열려있는 가능성을 맛볼 수 있다 요즘은.
이제야 제리가 매일 아침 만들어준 쉐이크가 보인다. 청소를 해주고 요리를 해주고 우리 집의 시간을 위해 늦게 까지 일하는 시간들이 보인다. 마음이 괜찮아지니 세상이 보인다. 진짜 정말 많이 괴로웠다. 그러고 보면 그 시간 동안 고개 처박고 우느라 썪어나는 내 속만 보였지 고개 들어 주변을 보지 못했다. 누가 도우려고 오면 눈물 닦는 손길에 나도 모르게 상대 손을 뿌리쳐버릴 때가 있었다. 이 시간들을 다른 사람들도 겪게 되지 않을까?
출산의 만반의 준비를 했던 내가. 아이를 품고 네팔까지 다녀왔던 내가. 똑똑한 마음을 즐겼던 내가 아팠다.
아이를 낳게 되니까 워킹망이다 뭐다 일은커녕 내 시간과 정신을 제대로 세우기가 싶지 않았다.
뭘까. 뭐였을까 나의 그 처절하고 무기력했던 시간들은. 이유도 뭐도 설명하기가 어렵다.
혹 친구나 가족들이 아이를 낳고 이런 우울감을 겪게 된다면 적극적으로 돕고 싶다. 어떻게든 해보려고 명상을 하고 심리상담을 받고, 내면탐구 워크숍을 받았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했는데 하나씩 쌓여 마음이 촉촉해져지고 있다. 그랬더니 이렇게 글도 써진다.
제리가 내 힘든 시간을 기록하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그때는 그 말만 들어도 지쳤다. 남들을 내가 어떻게 돕겠으며 내 시간들이 부끄럽다고 여겼었다. 빨리 나아야 하는 뿌리쳐야 하는 이겨내야 하는 시간으로만 생각했다. 아니야 아니야. 뭐가 됐든 다 내 시간이고 자산이다. 마음이 좀 바로 서니까 이렇게 글로도 남긴다. 그전에는... 내가 이런다는 게 부끄럽기만 했는데..
그 아무도 도울 수 없는 나의 시간. 나를 부축해 주고 잡아줄 가장 가까운 관계는 나다. 남편도 부모도 해줄 수 없다. 내가 해야 해. 다시 의문의 무기력감이 올라올 때도 예민함에 감정이 젖을 때도 있지만 괜찮다. 이 모든 감정도 내가 헤아려 주고 싶다.
수고했다 정은아. 많이 힘들었지? 네가 위대한 출산을 했기에 시간이 필요했던 거야. 잘했어. 정말로 잘했어
사랑한다. 수고했다. 힘들 때는 좀 쉬어 내가 다독여줄게. 내가 내게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