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위기에 처했습니다 ; 파빌리온 72

ARCH:IVE THEATRE에서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 1

by 인애


음악은 태어날 때부터 그냥 다들 한 번씩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저에게는 오히려 음악이 타고난 신체기관을 가지고 노는 본능적인 놀이고 -


《파빌리온 72》를 기록하던 중, 만화 《부르다가 내가 죽을 여자뮤지션》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갓난아기는 훈련받은 성악가만큼이나 완벽한 발성을 가졌다고 한다. 나고 자라 이족보행을 배우고, 남들과 같은 크기로 말하는 것을 배우며 복식호흡의 감각은 점차 퇴화된다. 그래, 우리 모두는 이미 슬픈 노래를 부르며 삶에 떨어졌고, 땅에 발을 딛으며 그 선율을 잊어버렸다.


극장은 지극히 의도된 소리로 공간을 채운다.

오케스트라, 음성, 폭풍우, 전자음, 익히 알고 있던 팝송부터 - 난생처음 들어보는 파열음까지. 극장은 의도한 소리만을 들려주기 위해 불필요한 소음을 지우고, 관객들이 그 틈새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잡아당긴다. 이것이 옳은 행위인지에 관한 질문은 필요 없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관객은 아름다움에 온전히 심취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관객 스스로 그 권리를 포기한다면.

나에게 《파빌리온 72》의 관객들은 그 아름다움에 기꺼이 배신당하기 위해 극장을 찾은 사람들이다. 멀끔하게 설계된 소리를 가만히 감상하는 대신 틈을 만들고 생채기를 내어 그곳에서 사유하기를 원하는 사람들. 그래서 내가 《파빌리온 72》에서 만든 이의 사랑을 느꼈던 것 같다. 소리의 당연함이 사라진 극장을 새로운 감각으로 채울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관객들을 향한 사랑. 너무 거창하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뭐, 관객을 위하지 않는 연극은 Theatre가 아닌 것을.

도래한 미래, 소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파빌리온 72》를 만든 이. '카입'은 '소리는 극에서 필수 요소인가?'라는 질문으로 〈극장의 다음 : 다가올 낯선 감각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2500년이라는 연극 역사에도 불구하고, 소리는 여전히 그 자식뻘쯤 되는 영상 매체와 같은 문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정보가 시각을 통해 수집되는 인간 종족 특성상, 무대, 의상, 조명 디자인의 발전에 비해 사운드 디자인의 발전은 한없이 더디다.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것, 《프로젝트 헤일메리》에 등장하는 로키와 에리디언들은 음파를 통해 '본다'. 그럼 그들이 만드는 연극은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을까?)

물론 《파빌리온 72》가 정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카입'을 비롯한 협력 예술가들은 180일간의 활동 끝에 '왜 미래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단일하고 확정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일까?'라는 새로운 질문에 도달했다. (소리에서 출발해 미래로 도착하다니. 그런 대화를 나눴다는 것에 묘한 부러움이 일었다.) 우리에게, 그리고 극장에게 익숙하다 못해 잊혀갔던 '소리', 그것을 이용해 미래를 향한 당연한 감각에 거리를 둔다는 발상은 참으로 놀랍다.

그들은 소리를 위기 상태로 밀어 넣어 내일을 사유하게 했고, 역으로 내일의 감각과 멀어짐으로써 소리의 내일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사운드 디자인의 발전에 관한 해답을 얻어낸 것은 아니다. 애초에 올바른 답을 내리고자 던진 질문이 아니기도 하고. 다만 72시간이라는 생존의 임계점 속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소리가, 극장이 재난 상황에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상처를 읽어야만 보이는 존재들.

ARCH:IVE THEATRE의 《파빌리온 72》 리뷰 콘텐츠를 마무리할 때도 언급했다시피, '뭐야 어디서 봤던 거잖아'라는 느낌을 받은 것은 참여 예술가가 참신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연극'이라는 장르가 너무 무르고 물러서다. 연극은 자기 정체성을 지키는 데만 1500년쯤 걸린 기분이다. 이제 연극은 어디로 가야 할까.《파빌리온 72》가 그랬듯, 연극이라는 존재 자체를 위기에 빠뜨리고 부상을 입혀야 사유의 틈이 벌어지지 않을까.


우리가 우리의 기원을 찾아 올라가면, 슬픔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

그러니 연극이 자신의 기원을 찾아 올라가면, 아주 오래전 잃어버린 선율을 들려줄 수 있지 않을까.




지극히 개인적인 후기를 말하자면, 다른 관객들이 해체된 연극에서 사유의 틈을 즐기는 동안, 내가 오롯이 놀지 못했음에 한탄했다. 지금껏 붉은 객석에 홀로 앉아 부유하는 감상을 잡아내려 애썼는데, 《파빌리온 72》만큼은 혼자이기에 놓쳤던 것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더불어 내가 사랑하는 목정원 작가님의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속 〈비극의 기원〉을 조심스레 추천해 본다. 우리가 잃어버린 슬픔의 노래를, 비극의 기원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