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있는 삶', 많은 것이 변했다
'강과장, 이번 행사 제대로 세팅 돼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이이잉~. 새벽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내 남편의 핸드폰이 울렸다. 업무 확인 카톡이었다. 남편의 출근시간은 9시. 어제도 밤 11시가 되어서야 돌아온 그였다. 당시 남편은 스트레스가 쌓인다며 종잡을 수 없이 화를 내곤 했다. 술과 담배는 부쩍 늘었고, 안색은 점차 검어졌다.
나도 회사에 지쳐가던 때였다. 시한폭탄처럼 우리는 누가 먼저 회사를 그만두게 될까 눈치를 봤다.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 해진 우리는, 쉴 곳이 필요했다. 하지만 집은 충분한 휴식을 주지 못했다. 집에 돌아오면 쓰레기 분리수거, 청소, 빨래, 음식 때문에 다시 송곳같아졌다.
특히 나는 더 그랬다. 똑같이 일을 하는데, 남편의 잦은 야근 때문에 살림은 거의 내 차지였다. 사소한 것 하나가 다 짐이 됐다. 눈물이 났다. 피해자인양 서럽게 울었다.
"너가 안하면 내가 해야 한다고. 너만 일하는 거 아냐. 최소한 미안은 하란 말이야."
딱한 노릇이었다. 안다. 지쳐있다는 걸. 누구보다 더 알고있던 터였다. 그래도 난 무슨 죄인가.
그러던 초겨울, 난 두번째 유산을 했다. 모든게 싫었다. 좋아했던 일도, 벌어도 벌어도 불어나지 않던 통장잔고, 늘어가는 카드값도, 30살에 받게된 디스크수술, 터져버릴듯한 몸뚱이에 태아 하나 몸에 붙게 하지 못한 건강까지. 모두가 싫었다.
사표를 쓰고 집안에 눌러 앉았다. 남편은 슬퍼보였지만, 꾹 참고 있었다. 차마 나에게 모진 말은 못했다. 내 몸은 치료가 필요했다. 틀대로 튼 몸의 절반은 덜어내야 했고, 운동과 약으로 보해야 했다. 우선 살을 빼고 아이를 갖자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도 한계에 다달랐다.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난 그만두라 했다. 나도 회사가 힘들다고 사직서를 썼는데, 남자라서 쓰면 안된다고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두려웠지만, 남편을 믿었다. 금방 새 직장을 잡을거라고.
둘다 실업자가 됐다. 다행이 남편은 한달도 안돼 새 직장을 잡았다. 새 생활이 시작됐다.
출근시간은 8시 30분으로 앞당겨졌다. 하지만 야근이 없었다. 많은게 변했다. 이유없이 화를 내지 않았다. 그게 제일 좋다. 무엇보다 가정주부가 된 내가 집안살림은 거의 전담했기에, 남편은 매일매일 저녁 7시10분이면 깨끗한 집에 들어와 7시30분이면 따끈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2교대로 엉망진창 됐던 호르몬분비가 안정됐다. 아침이면 일어나 남편에 출근 인사를 하고, 청소나 빨래를 하거나 글을 쓰다 아쿠아로빅을 하고 와서 자유시간을 만끽한다. 물론 살림을 하면서 곤궁한 탓에 용돈을 조금 벌어쓴다. 들어오는 돈이 적어 초라하다 느낄 때가 더 많고, 취업사이트에 들어가 지원할 회사가 있나 눈팅을 할 때면 비극적이다. 뭐하고 살았나 제일 답답한 순간이긴 하다. 앞날도 깜깜하다. 살이 덜 빠질 때면 우울함이 몰려올 때도 많다.
그래도 삶에 숨통이 트이니 지식을 쌓을 시간이 늘었다. 머리와 가슴에 스며든다.
그리고 제일 좋은건 이제 남편과 마주앉아 이른 저녁을 함께 할 수 있다. 8시부터 12시까지 이야기도 하고 야구도 보고 예능도 보고 맥주도 마시고. 그러다 보니, 서로가 더 소중해졌다.
내 남편이 돌아오는 7시 10분. 우리집은 따뜻해진다. 오늘도 쉼이 있는 삶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