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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니 Sep 18. 2023

삼개주막 기담회

국민학교 시절, 방학이 되면 나는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는 할머니의 옛이야기를 들으며 여름밤을 보냈다. 마당에는 모깃불이 매캐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잘 익어 탐스럽게 붉은 토마토가 대롱대롱 매달린 텃밭 근처에는 암탉들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닭장이 있었다. 여우 누이가 둘째 오빠의 간을 빼먹는 대목 같은, 이야기의 절정에 다다르면 어김없이 닭들이 “꼬꼬댁 꼬꼬!” 소리쳐 댔다. 족제비나 오소리 녀석이 야음을 틈타 닭장을 습격한 것이었다. 무서운 이야기에 두근댔던 가슴이 그 소리에 놀라 내려앉았다. 마당을 지키던 백구 봉식이는 쏜살같이 닭장으로 출동해 침입자들을 산으로 쫓아냈다. 그러고 나면 마당은 순식간에 평화로워졌고 모기장 안에서 할머니의 팔베개를 벤 나는 이야기를 조르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삼개주막 기담회]라는 책을 읽었다. 이 기담 집은 어렸을 때 듣던 할머니의 옛이야기가 생각나는 책이다. 할머니께서는 곧잘 아슬아슬한 대목에서 이야기를 끊으시고 담 날에 듣자고 하셨다. 조급함에 몸이 달았지만 길고 긴 여름날, 하루 종일 강에서 헤엄치고 개울에서 고기 잡느라 피곤해진 나는 고만 곯아떨어지곤 했다. 다음날 저녁 이부자리를 펴고 할머니 옆에 누우면 할머니께서는 그다음 대목부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옛말이 섞여 정겨운 가락으로 마치 시를 읊듯 들려주시는 이야기는 듣는 맛이 좋았다.


[삼개주막 기담회]는 읽는 맛이 굉장하다. 6편의 단편들로 구성된 이 책은 조선시대 마포나루를 배경으로 한다. 마포나루 어귀에 위치한 삼개주막에는 보부상들, 양반님네들, 하인과 상놈들이 오간다. 이 책은 진한 막걸리 향과 함께 그 사람들이 풀어놓는 기이한 이야기를 옴니버스 구성으로 들려준다. 실제 역사와 적당히 버무려 이야기를 엮어내기 때문에 마치 실제 일어났던 이야기인 듯한 착각도 든다. 이야기는 모두 전래동화처럼 권선징악과 교훈을 담고 있다. 설정은 옛날이지만 등장인물들은 지금 사는 오늘의 인물들인 것처럼 생생하게 살아있다. 또 단편이라 읽기에 부담스럽지도 않다. 채집한 것이 아니라 창작한 기담들로 스릴러와 추리, 환상과 호러가 복합된 이야기에 현대적인 감각이 결합되어 신선한 새로움이 느껴진다.


이 책은 총 4권이 시리즈로 나와있는데 곧 5권이 나온 다니 기대가 된다. 인터넷 서점에서 알림이 뜨면 얼른 예약 장바구니에 넣어 놓아야지. 느릿느릿 물러나고 있는 여름의 끝자락에 홑이불 덮고 할머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듯 또 한 번 옛이야기의 세계로 들어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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