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by 김제니

위대한가, 혹은 위대하다는 착각인가? -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누구나 꿈꾼다. 더 나은 삶, 사랑의 완성, 과거의 회복. 그러나 F. 스콧 피츠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를 통해 묻는다. 그 꿈은 과연 닿을 수 있는 것인가? 그 사랑은 진짜였던가, 아니면 욕망이 만들어낸 환상이었던가? 개츠비는 말한다. 사랑을 붙잡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의 시선이 끝없이 향하던 그 초록 불빛은, 데이지라는 이름의 허상이었다.



개츠비는 American Dream의 상징이다. 가난한 청년이 고급 정장을 입고, 호화 저택에서 파티를 열고, 전쟁 영웅의 훈장을 품에 안는다. 그는 모든 걸 가졌다. 단 하나, 데이지의 진심만 제외하고. 그는 오직 그 하나를 위해 전부를 건다. 그가 사랑했던 것은 데이지가 아니었다. 그녀를 향한 집착, 그녀를 통해 이룰 수 있으리라 믿은 완벽한 세계, 즉 사랑이라는 이름의 자기 최면이었다. 그는 데이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되찾는 것, 그 자체를 사랑했다. 그 순간이 오면 세상의 모든 불순이 용서될 거라 믿었다. 그는 끝내 오지 않을 신호를 향해 밤마다 등대 앞에서 손을 뻗었다. 그의 죽음은 우연이 아니다. 그의 삶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설계된 비극이었다. 만약 총에 맞지 않았다면, 다른 방식으로 그의 허상은 반드시 무너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묻는다. 그는 왜 ‘위대한 개츠비’인가. 사랑이라는 목적 하나에 자신의 전 생애를 불태웠기 때문일까. 그 어리석음, 그 집요함, 그 절망까지도 끝끝내 한 사람에게 바치려 했던 고요한 광기. 그것이 이 허위의 시대에 우리에게 한 줌의 순수를 남긴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이 소설은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결국 이 소설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허상이 너무도 찬란하게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개츠비의 실패는 곧 아메리칸드림의 붕괴이며, 이 소설은 그 붕괴를 이미 알면서도 또다시 노를 젓는 인간의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비참하게 죽지만, 닉은 말한다. “개츠비는 위대한 자였다.” 왜냐하면 그는 끝까지 믿었고, 끝까지 꿈꾸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덮으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혹시 나도, 내 안의 초록 불빛을 향해 맹목적으로 노를 젓고 있지는 않은가? 현실이 아닌 꿈을 사랑하고, 사람이 아닌 환상을 붙들고 있는 게 아닐까.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랑’조차도 어쩌면 사랑이라는 착각은 아닐까.



별점: 3.5

추천 대상: 꿈을 좇고 있는 모든 이, 혹은 한 번쯤 사랑을 잃어본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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