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를 노래한 두 피츠제럴드

엘라와 스콧의 공허한 아름다움 [위대한 개츠비]

by 김제니

젊은 날 외국항공사 승무원으로 근무하며 한국비행을 올 때면 남산에 위치한 한 호텔에서 묵었다. 그 호텔에는 지하 1층에 바가 있었는데 밤 비행을 끝마치고 호텔에 도착하면 옷만 갈아입고 서둘러 그곳으로 내려갔다. 라이브 재즈 공연을 듣기 위해서였다. 매일 밤, 키가 큰 재즈 보컬리스트가 ‘Misty’를 불렀다. 뿌연 노란 조명 아래에서 들려오던 그 노래는 정말이지 매혹적이었다. 웅성거리는 소음 속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는 내 귀에 착 감겼다. 그때부터 나는 엘라 피츠제럴드와 재즈를 사랑하게 되었다.


엘라 피츠제럴드와 스콧 피츠제럴드. 이름은 같지만, 하나는 재즈의 여왕이고, 하나는 20세기의 가장 우아한 소설가이다. 이들은 각자의 언어—엘라는 목소리로, 스콧은 문장으로—한 시대의 허망함과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엘라의 목소리는 마치 안개처럼 맑고, 그 안에는 잡히지 않는 허무가 있다. 그녀가 부르는 재즈 스탠더드를 듣고 있으면, 우리는 사랑이 영원하지 않음을 더 깊이 느끼게 된다. 그녀는 영원히 붙잡을 수 없는 것에 대한 노래를 무심하고도 투명하게 들려준다. 그 음색 속엔 연인도, 청춘도, 밤도 사라지고 남는 텅 빈 공간이 있다. 마치 삶이 가장 아름다울 때, 동시에 가장 허무하다는 것을 일깨우듯이.


"Look at me, I’m as helpless as a kitten up a tree."

엘라 피츠제럴드가 노래하는 ‘Misty’의 첫 구절은 한눈에 파악할 수 없는 감정의 깊이를 보여준다. 사랑에 빠진 순간, 사람은 중심을 잃고 휘청인다. 마치 안갯속을 걷는 것처럼. 길도, 방향도 흐려지는 감정. 그야말로 "Too much in love"인 상태. 이 곡은 바로 개츠비의 사랑이 가진 본질과 닮아 있다.


[위대한 개츠비]는 엘라의 ‘Misty’를 소설로 써낸 것 같은 작품이다. 닉 캐러웨이의 눈을 통해 그려지는 개츠비의 호화로운 저택, 끝없는 파티, 환상 같은 사랑은 결국 한 남자의 손끝에서 흩어지는 꿈이었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1920년대 황금빛 소비주의 이면에 숨은 쓸쓸함을, 황홀할 만큼 아름다운 문장으로 담아냈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 사랑은 현실의 여인이 아니라, 기억과 환상의 결합체였다. 그가 사랑한 것은 데이지가 아니라, 그가 만들어낸 데이지라는 이상. 마치 ‘Misty’ 속 화자가 사랑에 빠져 흐릿한 현실 속을 걷는 것처럼, 개츠비는 오직 녹색 불빛만 바라보며 안갯속을 걸어간다.



나 역시 그랬다. 외국 항공사 승무원으로 10년 넘게 일하며, 늘 돌아갈 집을 소망했다. 처음엔 지구별 모든 곳을 여행하고 싶어 비행기를 탔지만, 꿈이 실현되고 나자, 오히려 돌아갈 나만의 공간이 간절해졌다. 호텔에서 호텔로 전전하는 삶은 불안했고, 홍콩에 있던 내 집조차 임시숙소처럼 느껴졌다. 휴가가 생기면 또다시 다른 나라로 떠났고, 여행은 황홀했지만 이상하리만치 허무했다. 남태평양의 타오르는 석양아래서도 소설 속의 '닉'처럼 '헤어나기 힘든 외로움'을 느끼곤 했다. 그럴 때면 엘라의 목소리를 들었다.

‘Misty’에서 엘라는 자신을 "my right foot from my left"도 구분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 가사는 단순한 사랑의 감정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혼란을 말하는 듯했다. 개츠비도 5년 동안 이상화된 데이지를 그리며 돌아갈 곳을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는 그녀를 위해 달콤했던 과거 전체를 재현하고 싶어 했지만, 세월은 돌이킬 수 없고, 사랑은 그 기대를 저버린다. 결국 그가 돌아갈 곳은 없다.


엘라는 ‘Misty’를 통해 사랑의 감각을 안개처럼 흐릿하고, 그 안에서만 존재 가능한 꿈처럼 노래한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사랑을, 한 남자의 삶 전체를 건 환상으로 묘사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삶의 가장 황홀한 순간이 곧 가장 허무한 순간임을 들려주고, 써 내려간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남긴 이 두 작품 속에서 아름다운 허무를 듣고,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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