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드소마>를 보고
몇 년 전 가 본 로마에는 피노키오 상점이 있었다.
어느 골목이었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곳에 멈춰 서서 한참을 바라본 나무 인형 하나는 지금도 내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빨간 모자를 쓰고, 초록 반바지를 입고, 나무다리를 가지런히 세운 채, 그 인형은 상점 앞에서 정면만을 바라보며 끝없이 웃고 있었다.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엔 온기가 없었다. 무표정한 눈, 굳어 있는 입 꼬리. 나는 그때, 그 인형이 “웃어야 해서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군가가 ‘넌 웃어야 해, 그래야 모두가 안심하니까.’ 하고 이마에 명령을 새겨둔 것처럼. 그 기억이 다시 떠오른 건, 영화 《미드소마》의 마지막 장면을 보았을 때였다.
데니는 가족을 모두 잃고, 외로움 속에서 허우적대던 인물이다. 감정을 나눌 사람도, 의지할 사람도 없이 조용히 부서지고 있던 그녀는 우연히 찾은 스웨덴의 호르가 마을에서 ‘환대와 공감’이라는 낯선 정서를 만난다. 그 마을 사람들은 데니가 울면 함께 울고, 그녀가 슬퍼하면 더 큰 소리로 슬퍼한다. 그들은 그녀를 안아주고, 둘러싸고, 축제의 중심으로 떠민다. 마침내 데니는 메이퀸이 되고, 마을의 중심이 된다. 축제의 중심에서 웃고 있는 데니의 얼굴은 로마의 피노키오처럼 무표정하고, 정면만을 바라보며 텅 비어 있다. 그녀는 웃고 있지만, 자신이 왜 웃는지도 모른다. 그 웃음은 위로의 결과가 아니라, 마을의 통제된 세계 안에서 만들어진 연극적인 역할이다.
난 미드소마의 데니의 남자친구가 그렇게 무심하고 이기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나이대의 남자는 가벼운 관계를 선호하고, 즐거운 관계를 선호한다. 너무 많은 불행이 닥쳐서 계속 울기만 하고, 본인한테 매달리면서 위로받기만을 원하는 그런 여자 친구는 그에게 너무나도 큰 부담이다. 그는 그냥 보통의 남자일 뿐이다. 그는 그 마을의 거대한 구조적 악에 맞서기엔 너무 나약한 사람이었다. 악한 것은 데니한테 그렇게 판단을 할 것을 계속해서 묵시적으로 압박을 주는 그 마을사람들이다.
마을사람들은 묵시적 동조와 문화적 압박, 그리고 감정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사람을 지배한다. 그들은 소리 지르거나 협박하는 대신 기괴한 미소와 꽃, 제의, 전통, 공동의 감정 표현으로 대니를 감싸 안는다. 남자친구를 희생의 제물로 고르라고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지만, 온몸으로 그걸 강요한다.
그래서 대니의 마지막 선택은 진짜 무섭게 느껴진다. 대니는 “자기 의지로”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마을이 정교하게 짠 ‘감정의 미로’ 안에서 유도된 결정이었으니까. 일단 그 마을에 들어가면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준비된 덫. 마치 식충식물의 잎에 갇힌 초파리처럼 천천히 흡수되어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그런 덫에 걸려들었을 뿐. 그 마을은 마을의 젊은이들을 세계의 여러 곳으로 보내서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젊은이들을 꼬여서 데려오게 만든다. 마을 전체가 바로 사이비 집단이고, 그게 바로 어렸을 때부터 집단 세뇌가 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일이 벌어져왔을지.
그러므로 이 영화를 단순한 공포물로만 볼 게 아니다. ‘인간 심리와 집단 구조의 어두운 음지’ 그 자체인 마을은 기괴한 평온을 유지한 모계사회이다. 여성이 통치하고, 결정하고, 제의에 참여하며, 남성을 소모한다. 더 자유롭지도 않고, 더 평화롭지도 않으며 오히려 더 정교하게 개인을 무력화시킨다. 마치 남성과 여성의 대립처럼 보였던 도입부와는 달리, 이건 “남성과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성별이든 권력을 가진 집단이 타인을 어떻게 구조화하고 흡수하는가.”의 문제이다. 이 마을은 외부와의 교류 없이 폐쇄적인 모계 중심 질서를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완전히 다른, 기괴한 도덕 체계를 만들어냈다. 문화란 무엇이고, 윤리란 어디서 오며, 인간은 무엇을 통해 자기 자신을 유지하는가. 도덕은 정반합으로 발전되어야 견고하게 유지가 되는데 이 마을의 도덕 윤리란 그런 도덕적인 성찰이나 합의가 없이 그냥 ‘늘 그래왔기 때문에’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 무비판적인 반복이 진짜 소름 돋는 부분이다. 이 폐쇄적인 마을의 여족장은 근친상간이 일어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자 새로운 유전자를 끊임없이 공급하고 있다고 태연하게 얘기한다.
결국 대니는 살아있는 인신공양이다. 그녀는 살아남았지만, 자기의식을 바치고, 자기 판단을 없애고, 자기감정을 공동체와 같이 한다. 자기 의지를 회복한 게 아니라, 자기 의지를 의식 없이 내어준 채 ‘따뜻한 수용’을 선택한다. 그래서 진짜 인신공양은, 불에 타는 사람들이 아니라, 꽃을 쓰고 웃고 있는 그녀이다.
그녀는 살아 있는 채로 바쳐졌고, 그녀는 스스로 바쳐지기를 원했고, 그녀는 그 고통을 구원처럼 받아들였다. 꽃 왕관을 쓰고 웃는 마리오네트, 줄은 안 보이지만, 손짓과 미소는 이미 오래전에 정해졌다. 대니는 인형이 되었고, 자기 목소리는 공동체의 울음 속에 흩어졌고, 그 눈빛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인형의 눈빛이 되었다.
그로써 데니의 외부세계는 철저하게 파괴가 되고 외부세계 자체가 아무 의미 없는 곳으로 전락하게 된다. 외부세계에는 그래도 도덕적인 기준이 있고 또 선함과 악함의 구분이 있는데 이 마을에는 전혀 새로운 어떤 기준이 있고 그것은 도덕적이지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니는 그것이 악하다는 그런 의식조차 못하게 되었다. 대니는 마을에서 살아남은 게 아니라, 흡수된 것이다.
인간의 마음을 조종하고 상황을 조작하는 그런 악마적인 행위가 용이한가?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서 질문한다. 순수하게 데니의 슬픔을 동조하며 울어주는 것 같은 그런 장면에서 가장 섬뜩하게 느껴졌던 것은 끊임없이 데니를 관찰하는 마을 사람들. 데니가 울 때 본인들도 더 크게 울고 데니가 울부짖을 때 본인들도 더 크게 울부짖고 그렇게 데니를 면밀히 관찰하면서 마치 한 몸과도 같이 반응을 하는 게 무척 섬뜩한 일이었다. 이 마을은 데니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들은 데니를 연구하고, 수집하고, 해석하고, 바꿔버린다. 이쯤 되면 데니의 내면에서는. 데니의 외부세계는 완전히 파괴됐다고 볼 수 있다. 이건 윤리적 판단의 마비, 정체성의 유기, 말 그대로 “감각의 재배치”이다. 마치 새로운 도덕의 기준을 배운 것처럼. 그래서 미드소마는 심리영화로서 의미를 가진다. 철저히 관찰되고 철저히 통제되는 외부인이 그 마을의 의도에 맞게 행동하도록 조종당한다는 그런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로 매우 행복한 상태에서 이 비틀어진 마을의 기준을 받아들이게 되는 그 심리적 변화가 너무 섬뜩하고 또 흥미롭다. 주인공 데니는 외면받고 소외되는, 외로운 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그런 주변인들 같은 대부분의 현대인들을 상징한다.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가.
마을사람들은 마치 집단적인 메피스토 같다. 만약에 내가 그 마을로 발을 들여놨었다면 나는 노인 둘이서 절벽에서 자발적으로 떨어져서 죽었을 때 바로 탈출을 했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심지어 그 남자 노인은 떨어졌을 때 바로 죽지도 않았는데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망치로 때려죽인다. 마을 사람들은 무척 태연하고 아주 냉정하게 이방인들한테 설명한다. 이것은 우리의 문화라고. 그렇게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는데도 ‘이 마을에서는 으레 그러는 거다, 나이가 되면 마을 공동체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희생한다.’ 이렇게 설명하는 걸 듣고 납득을 한다는 게 너무 이상하다. 자기들이 관찰자라고 생각하는 젊은이들. 사실 그들은 그 폭력의 철저한 방관자일 뿐이다.
문득 오늘의 나를 떠올린다. 몸은 피곤하고, 눈꺼풀은 무겁고, 말수는 줄어든. 하지만 오늘도 웃는다. 진심이 아니라는 걸 나도 안다. 하지만 웃지 않으면 불안하고, 웃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아서 기계처럼 미소를 걸어본다. 그 미소는 누군가에겐 친절일 수 있고, 누군가에겐 무관심일 수 있고, 나에게는 방어막이다. 데니도 그랬을 것이다. 그녀는 살기 위해 그 미소를 선택했다. 그 미소 안에 모든 질문을 눌러 담고, 그 미소로 모든 무너짐을 감췄다. 그녀가 걸려든 줄은 거미줄 같았다. 조용히, 정교하게, 도망갈 틈 없이 그녀를 감싸며 ‘이제 너는 안전하다’고 속삭이는, 그러나 실은 생기를 빨아들이는 거대한 함정. 웃는 인형은 무섭다. 그 웃음이 자발적이지 않을 때, 그 웃음이 생존의 표정일 때, 그 인형은 더 이상 인형이 아니라 어쩌면 지금의 나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도 데니는 꽃 속에서 웃고 있다.
피노키오는 상점 앞에서 정면을 바라보며 웃는다.
그리고 나는,
살아내기 위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조금 더 기계적으로, 조금 더 부드럽게,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