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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니 Oct 13. 2023

외동딸 납치사건

세계문학전집을 갖게 된 사연

    “우리 집은 방 한 칸이 다 책이야.” 친구가 자랑했다. 국민학교(초등학교의 옛말) 2학년 때의 일이었다. “우리 학교 도서관보다 책이 더 많다고!” 자랑하는 친구의 말에 군침이 돌았다. “책 제목이 번쩍번쩍하는 금색이야. 우리 아빠만 들어갈 수 있는 방인데 너한테 특별히 보여 줄게.”라고 말하는 친구의 뒤를 따라 학교가 파하자마자 친구 집으로 갔다. “친구 데려왔네? 잘 놀아라.” 홈드레스(집에서 입는 자수가 놓이고 레이스가 달린 긴 원피스)를 길게 떨쳐입은 친구 어머님은 친구방에 주스와 롤케이크를 놓고 사라지셨다. 우리는 방을 나와서 친구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갔다.

    과연 그 시절 보기 드문 장서였다. 벽면 가득한 세계문학 전집과 아름다운 화집, 방 한가운데 놓인 고풍스러운 커다란 책상과 푹신한 의자. 나는 양 손바닥을 바지에 닦고 눈앞에 꽂혀 있는 [아 Q 정전]을 꺼내 들었다. “너 진짜 읽으려고? 이거 되게 두꺼워.”라고 말하는 친구의 말을 흘려들으며 나는 의자에 기어올라갔다. 책표지에 찬란한 금색으로 쓰여있는 책 제목을 한 손으로 쓰윽 쓰다듬어 보았다. 내 손끝도 약간 반짝이는 것 같았다. 이 책에는 과연 어떤 이야기가 들어있을까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책을 펼치고 커다란 의자에 푹 파묻혀 앉아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 Q 정전을 다 읽고 고개를 드니 친구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번에는 [제인 에어]을 뽑았다. 스산한 바람이 부는 영국의 로체스터 저택(소설 [제인 에어]의 배경이 되는 저택)으로 걸어 들어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너무 어두워져 고개를 들어보니 밖이 깜깜했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처음 보는 아저씨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니, 너 누구냐?” 아저씨가 말했다. 나는 “저는 은영이 친구예요.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며 의자에서 내려왔다. 친구 어머님께서 달려오셔서 아직도 안 가고 책 읽고 있었냐며 놀라워하셨다. 아버님께선 집이 어디냐고 물어보시곤 그 당시 흔치 않던 자가용으로 우리 집까지 데려다주셨다. 나는 몇 번이나 친구 집을 뒤돌아봤다. 빛나는 금색의 제목이 박힌 아름답던 책들이 멀어지고 있었다. 아저씨는 그런 나를 보시곤 언제든 와서 책을 읽으면 된다며 올 땐 반드시 엄마 아빠께 알리고 오고 저녁 먹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고 조금 안심했다. 중간까지 읽다 만 [제인 에어]를 생각하다 보니 우리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우리 집 앞이 어수선했다. 경찰차가 몇 대나 경광등을 켜고 서있었다. 경찰아저씨들도 여러 명이 집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일까?  아버지께서 경찰서 강력계 형사과장이라 사건이 있을 때마다 출동하시는 것을 여러 번 봐왔지만 경찰차가 너무 많았다. 차가 우리 집 앞에 멈추자 경찰 아저씨들이 일제히 우리 차를 둘러쌌다. “여기 있다! 여기 찾았다! 차 문 열어!” 아저씨들의 목소리가 크고 무겁게 들렸다. 친구 아버지는 당황하시며 “이게 무슨 일이야?”라고 하셨다. 문이 열리자 나는 아저씨들의 손에서 손으로, 집으로, 마루로 옮겨졌다.

    자초지종을 들으신 엄마께서 나를 나무라고 계셨을 때 나는 아버지께서 친구 아버님과 같이 어깨동무를 하고 들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우리 애가 그러니까 책 속으로 납치됐던 거네요, 허허.” 하시며 아버지는 웃고 계셨다. 하루가 멀다 하고 어린이를 납치하는 사건이 신문을 장식하던 시절이었다. 연락도 없이 사라져 버린 외동딸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불안해진 엄마가 경찰서에 계신 아버지께 전화하신 것이었다. 내가 사라지는 바람에 경찰 아저씨들이 등굣길을 골목골목, 동네 뒷산도 샅샅이 뒤지느라 고생하셨다니 너무 죄송했다. 경찰 아저씨들은 “우리 딸, 어디로 사라지면 안 돼. 엄마 아빠 심장 상하신다.”라며 내게 한 마디씩 하시곤 돌아가셨다.

    어머님께선 서둘러 친구 아버님께 늦은 저녁을 대접하셨다. 폐를 끼쳐 미안하다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셨다. 모든 게 나 때문이었다. 내가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려서. 나는 저녁밥도 몇 술 뜨다 말고 내방으로 건너갔다. 불을 끄고 이불을 덮고 있는데 어른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근데 아버님, 그 책이 어떤 책입니까? 우리 아이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읽고 있던 책 이름이…”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을유문화사의 세계문학 전집이에요. 제가 언제든 와서 읽으라 했으니 책 읽고 싶다면 보내주세요.” 아저씨가 말했다.

    아저씨께서 집으로 돌아가시자 엄마가 건너오셨다. 난 더 혼날까 봐 눈을 꼭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엄마는 한숨을 쉬시더니 갑자기 나를 간지럼 태우셨다. 난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엄마는 날 똑바로 앉히셨다. “아버지께서 너 세계문학전집 사주라 신다. 내 참, 너 때문에 오늘 얼마나 놀랐는데! 아저씨들도 고생하시고! 더 혼나야 하는데, 책 선물 받게 생겼네. 앞으로 어딜 가든지 전화부터 엄마한테 하고 가. 저녁밥 먹기 전엔 반드시 돌아오고. 책 사기 전에 이 약속 먼저 해.”라고 엄마가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들은 내 마음이 시나브로 몽글몽글해졌다. 제인 에어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없이 두근거렸다. “책 사면 내 방에 놔도 돼?” 내가 말하자 엄마는 엄한 표정으로 약속부터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다가 내가 자꾸 실실 웃자 기가 막혀하시며 같이 웃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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