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현 Jun 02. 2020

키친 그룹(Kitchen Group)

19. 07. 01. 스반홀름 16일차(덴마크57일차)

무언가 내게 정해진 할 일이 있다는 것, 내일 일어나면 내가 나갈 자리가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귀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키친 그룹에서의 한 주간이 시작됐다. 키친 그룹이었던 케이티와 존이 떠난 후로 일손이 부족한 탓에 이번 주는 내가 키친 그룹에서 일을 하기로 했다. 다음 주 새로운 일본인 게스트가 올 때까지. 임시로 일을 하는 곳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너무 애쓰려고 하지 않은 덕분에 긴 일과였지만 힘들다는 느낌 없이 일했다. 키친은 그날그날 일정에 따라 일하는 시간이 크게 변동됐다. 오늘은 오전 9시 반부터 오후 5시 반까지 길게 일했지만 저녁 식사가 없는 날인 수요일에는 2시면 일이 끝났다. 겨우 두 번째 인사를 나누고 일을 함께 한 키친 그룹 사람들이었지만 오늘은 어쩐지 더 친근감이 느껴졌다.




출근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차를 끓이는 일이다. 물을 데우고 6개의 보온통에 각기 다른 찻잎을 넣고 우려낸다. 찻잎이 종류별로 있는 창고에 가서 내가 원하는 종류의 차를 준비한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블랙티는 두 종류를 준비하고 내가 좋아하는 민트티와 여러 차를 준비했다. 찻잎을 거름망에 적당히 넣고 보온통에 올려 뜨거운 물을 붓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일인데도 처음 만져본 주방 기구들이라 조심스러웠다. 수십 명 분의 차를 만들 수 있도록 전기포트 대신 꼭지가 달린 대형 냄비에 물을 끓이는 일도 신기했다.



대량으로 음식을 만들어내는 주방이라 식기며 주방 기구들 사용법이 낯설었지만 금세 손에 익었다. 간이 부싯돌을 제작해 가스불을 만들어내는 레인지도 매력적이었다. 규모도 크고 만들어내는 음식의 양도 이전에 있던 식당보다도 더 많지만 전체적으로 편리한 구조를 갖춘 덕분에 일이 힘들지 않게 진행됐다. 감자를 씻으면서 껍질까지 깔끔히 벗겨주는 기계며, 단순한 구조지만 채소의 물기를 빼주는 플라스틱 통, 3중으로 된 식기세척기 구조까지, 자세히 보면 좀 더 편리한 진행을 위해 군데 군데 용접한 부분들이 보였다. 이곳에 와서 발견하는 재밌는 부분들은 생활하는데 좀 더 유용하도록 기구들이나 구조물을 조금씩 손으로 손보고, 직접 만들어서 사용한다는 점이다. 공장에서 일괄적으로 찍어내 나오는 공산품들로만 이루어진 도시 생활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물건들을 사용하다 보면 어쩌면 이런 게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손으로 내가 먹을 음식을 만들고, 작물을 직접 길러내고, 물건을 직접 만들어 쓰고. 문명은 마치 뭔가 엄청난 것이 생활 위에 있고 그걸 좇아 자꾸 위로 향해 가려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감에 필수적인 먹고, 자고, 싸는 일을 떼어놓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지반을 이루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고 어떻게 구성되는지 자꾸 잊는다. 기계가 멈추는 날이면 사람들은 제 손으로 쌀밥 하나 만들어낼 수 있을까. 덴마크에 와서 밭에 나가 내 손으로 흙을 만지고 주방에서 낱개의 재료들로 한 접시의 음식을 만들어내다 보면 모든 것이 사라진, 혹은 뒤엎어진 세상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기술을 배우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책으로는 결코 다 채울 수 없는 것을. 손으로 알게 되는 것들을.


그러다 보니 확실히 이야기가 자주 떠오른다. 몸으로 알게 되는 것이 많을수록 이야기는 더욱 풍성해진다. 여태껏 내가 얼마나 작은 틀 안에서 이야기를 만들려 발버둥 쳐왔는지 알게 된다. 이야기라는 것은 어떤 목적지를 향해 뻗어 나가는 것도 아니고 자주 흔들리고 어긋나가고 또 다시 돌아오면서 이야기 그 자체로 빚어지는 것인데. 거의 처음으로 재밌는 이야기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리고 문득 돌아간 나를 상상한다. 떠나오기 전에도 떠나온 나를 전혀 상상할 수 없었는데 역시나 다시 돌아간 나를 상상할 수가 없다. 도대체 내 생엔 어떤 삶이 펼쳐질까. 그런 아득한 생각을 하다 보면 지금 이곳에 머무를 6개월이라는 정해진 시간이 감사하다. 무언가 내게 정해진 할 일이 있다는 것, 내일 일어나면 내가 나갈 자리가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귀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몸이 느끼는 피로는 결코 덧없지 않다. 그 무게만큼 나는 일했고 내가 무언가를 했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증표니까. 어쩌면 돌아간 나는 몸으로 하는 일을 찾을지도 모르겠다.     





*메인 키친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이용하는, 가장 중요한 영역인 식사를 위해 메인 키친에는 다양한 식재료 창고가 있다. 차와 통조림, 덴마크 주식(主食)인 루그브뢰드(Rugbrød)를 두는 구역, 소고기부터 양고기까지 각종 고기가 있는 냉장고, 파스타와 쌀, 콩 등이 있는 곡류 창고, 해바라기씨부터 깨, 건포도 등 견과 창고, 밭에서 직접 기른 작물과 과일이 있는 냉장고, 계란과 우유 치즈가 있는 유제품 냉장고는 기본으로 채식주의자들을 위해 두유부터 쌀우유까지 구비되어 있고 수십여 가지의 향신료와 소스들도 준비되어 있다. 메인 키친에 있는 모든 식재료와 조리 도구는 우퍼를 포함한 마을 주민 누구나 다 사용할 수 있다. 전날 만들고 남은 요리들도 따로 보관하는 냉장고가 있어 요리를 못하는 사람도 언제나 제대로 된 끼니를 먹을 수 있다. 스반홀름에서 지내는 동안 풍성한 식재료들로 프랑스요리부터 한국요리까지 유튜브를 보며 다양하게 요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개인 가정에서는 결코 갖출 수 없었던 구색이 공동의 이름과 돈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은 삶을 더 풍요롭게 해주었다.




<덴마크 우핑 일기> 텀블벅 후원하기


https://tumblbug.com/1905061205


매거진의 이전글 전체 회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