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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공간의 미학 Oct 07. 2024

나는 어떻게 불릴 것인가?

시대예보 : 호명사회

작년 이맘때쯤 송길영 작가의 '시대예보 : 핵개인의 시대'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핵개인이라고? 핵가족은 들어봤는데 핵개인이라는 단어는 해당 저서에서 처음 본 느낌이었습니다. 분명 처음이지만 마치 처음이 아닌 것 같고, 핵개인이라는 단어를 정확하게 정의 내릴 수 없었지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낯섦 속에 있는 친숙함. 그것이 바로 송길영 작가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작가는 똑같이 시대예보란 타이틀을 가지고 '시대예보 : 호명사회'란 신간을 냈습니다. 예상컨대 '시대예보'란 타이틀로 세 번째, 네 번째 책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번 신간에서는 과연 어떤 사회의 변화를 포착했을까 궁금했습니다. 호명사회란 낯선 단어 속 어떤 친숙함 개념이 숨어있을까 찾아보고 싶어 졌습니다.


이번에는 책을 읽는데서 그치지 않고 북콘서트에 참가했습니다. 장소는 선릉역에 위치한 '최인아 책방'이었습니다. 최인아 님의 책도 너무 좋아하여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곳에서 송길영 작가도 볼 수 있다니 저에게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기회였습니다. 비록 불타는 금요일 19시 30분이었지만 말이죠. 그리고 저와 같은 분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우리 시대의 한 부분을 포착하고 싶은 사람이 이렇게 많구나'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혼란한 세상을 함께 하는 이들과 동지애를 느끼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책방 사장님인 최인아 님의 소개로 송길영 작가가 연단에 섰습니다. 그날도 그는 특유의 포니테일을 하고, 검정색 어두컴컴한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마치 미래에서 온 도사와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작가를 꼭 한 번 직접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팬심도 있었지만 강연에서 어떻게 청중과 소통하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Q&A를 사전에 받아보지 않는다고 하는데, 작가가 뿜어내는 아우라의 현장감을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만나본 결과는.. 역시는 역시다...라고 줄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작가의 포니테일은 도사라고 말하지 않은 자의 도사로서의 상징이었습니다.



시대예보의 첫 번째 책인 '핵개인의 시대'는 권위주의가 완벽하게 해체되는 과정에서 다가올 핵개인의 세상을 조망하였습니다. 핵개인의 시대는 이미 우리 삶에 다가온 현재라고 느껴집니다. 박 부장님의 회식 가자는 말에 선약이 있음을 당당하게 말하는 김대리, 정규교육의 무용함을 주장하며 자신만의 공부를 시작한 친구들, 결혼식은 사회가 부여한 관습이라며 당당하게 거부한 친구 부부 등 권위에 억압되지 않은 채로 자신만의 기준을 갖고 삶의 양태를 구성하는 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핵개인의 시대'는 우리가 한 번쯤 생각했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들을 언어로 잡아 현재를 조망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번 '호명사회'는 가장 앞단의 현재와 다가올 미래를 함께 포착하여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미래에 대한 과도한 불안에 사로잡혀서 삽니다. 불안은 위험을 제거하기 위하여 수 없이 많이 가능성을 시뮬레이션 하는 원동력입니다. 시뮬레이션의 결과, 미래에 보이는 가장 보장된 결과들을 쫓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내가 원한 것이 아니었거나 너무 많은 시뮬레이션 속에 지쳐버립니다. 이를 작가는 '시뮬레이션 과잉'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이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시뮬레이션을 한 결과 '상호 경쟁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합니다. 인플레이션이 무엇입니까? 내가 가진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가진 학교의 이름이, 자격증이, 어학연수가, 봉사활동의 가치가 떨어집니다. 상호경쟁의 굴레가 본래 필요한 역할보다 과도한 것들을 요구하는 상태입니다. '상호 경쟁의 인플레이션' 끝에서 우리는 마침애 그 결과가 잘못되었음을 알고 조직 내에서 소극적인 반항을 하거나 조직을 벗어나게 됩니다.


2. 더 이상 타인이 부여한 관점을 바탕으로 시뮬레이션한 결과가 나에게 유효하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개인에게 부과된 문제상황에 대해 타인의 관점에 종속시키지 않고, 나 자신의 '호'와 '오'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자신만의 관점을 찾고, 자신의 좋아함을 바탕으로 시작한 것은 멈추지 않고 깊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깊어져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저절로 깊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깊어지는 과정에서 나의 충실함을 알아봐 주는 사람들이 생기고, 이것은 나의 자립을 위한 밑거름이 됩니다.


3. 누군가 한 사람이 자신의 충실함을 갖고 나면 더 이상 다른 누군가를 배제시키기 위한 노력을 멈추게 됩니다. 자신의 깊어짐을 통해 누군가에게 기여하고, 다른 누군가의 깊어짐을 응원합니다. 이제 상호 경쟁의 인플레이션이 끝나고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단기 속성 과정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 한 사람의 고유성을 확인하고 나면 서로의 선택에 연대가 생기게 됩니다. 마침내 세상이 부여한 하나의 획일된 기준에서 벗어나 개인의 '호오'의 영역에서 서로가 함께 연대하여 살아가는 모습이 만들어집니다.


4. 개개인들이 자신의 영역에서 깊어지고, 이를 바탕으로 자립하게 될수록 조직은 작아지게 될 것입니다. 과거 분업화되어 아주 세부적인 영역을 담당하고 있었던 이들은 이제 자신이 깊어진 영역에서 만큼은 모든 것을 다하는 사람이 됩니다. 과거에 누군가 혼자서 미디어의 역할을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누구나 조명감독, 편집감독, 음향감독 나아가 콘텐츠 기획자까지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개인의 영향력이 극대화될 수 있고, 이미 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앞으로 이러한 현상은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갈 것입니다. 단기간에 벌어질 일이 아니겠지만 분명히 벌어질 일입니다. 결국, 나의 명함에서 나의 직장, 조직, 직함을 빼고 나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느냐가 실존에 직접적인 문제가 될 시기가 올 것입니다. 인간의 이름 석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름은 존재를 표현할지 몰라도 효용을 내포하지 않습니다. 과연 나는 어떤 효용을 제공할 수 있느냐, 나를 어떻게 규정할 것이며 나는 어떻게 불려야 할 것이냐를 고민하는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첫 번째 책인 '핵개인의 시대'는 이미 거의 다가온 눈앞의 사회 현실에 대한 모습을 보는 듯했습니다. 반면, '호명사회'는 '변화될 사회' 또는 '변화되고 있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으로 읽히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의문을 가졌습니다. 과연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호명될 수 있는 사회는 올 수 있을까요? 옆자리에서 열심히 통화하고 있는 송프로가 송길영이 되고, 옆 방에서 화가 나신 최상무 님이 최인아가 되고, 패션에 관심 많은 우 과장님이 우영미가 될 수 있을까요? 지나치게 유토피아적인 상상으로 흐르거나 호명되는 자와 호명되지 못한 자로 철저하게 나뉘는 디스토피아적 상상이 되지는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강연이 끝나고 작가님께 질문했습니다. "개인의 영향력이 커져 호명되는 사회의 흐름을 분명히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약을 만들어야 하고, 누군가는 도끼를 벼려야 합니다. 호명되는 자와 호명되지 않는 자로 나뉘는 모습을 상상하면 앞으로의 사회는 급격하게 불안정해지지 않을까요?" 나의 질문에 작가의 답변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관조하지 말고 참여하세요."


작가님의 정확한 워딩이 기억나지는 않아 제가 이해한 요지를 풀어써봅니다. 세상의 변화를 걱정하기 전에 과연 나는 이 변화의 흐름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먼저 고민할 것을 당부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적응하고, 새로운 삶의 방법을 찾아낼 것입니다. 비록 시간이 걸리고 부작용이 일부 있더라도 새로운 질서는 생겨날 것이며, 그 안에서 사람들은 또 다른 발전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와 약자에 대해 무관심하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관조한다고 하여 다가올 변화가 오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일어날 일은 그저 일어날 뿐입니다. 참여해야 그 안에서 사회를 따뜻하게도 할 수 있고, 연대의 과정에 참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한 질문 이외에도 작가님이 해준 여러 답변이 있었습니다.

사람마다 시대의 변화가 다가오는데 시간차가 있다. 당장 변화의 물결을 체험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주 오랜 시간 뒤에 겪는 이들도 생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오고 있는 사실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호명사회가 반드시 유명해지라는 것이 아니다. 남한테 불리기 위해 노력하지 말고, 남들이 나를 찾도록 해야 한다. 다시 말해, Personal Brading 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깊어짐을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충실하게 깊어진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호명되라는 것이 아니다. 나의 업에서만 호명되더라도 충분히 가치 있다. 사실 그 정도도 매우 어렵게 도달하는 영역이다.

나만의 본진이 있어야 한다. N잡을 한다고 그게 깊어짐으로 가지 않는다. N잡을 묶을 수 있는 Keyword가 있어야 한다. 본진을 두고 다른 것들을 경험하면서 깊어짐을 만들어내야 한다. 본진이 없는 다양한 경험은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돌아와 나의 질문에 대한 작가님의 답변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관조하지 말고 참여하세요.'


저는 그 답변을 듣고, 잠시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대한 비판적이고 관조적인 자세를 취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대해 지적 우위를 넘어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제가 지금 고민해야 할 것은 다가오지 않은 유토피아 또는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이미 다가온 현실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였습니다. 현실에 발붙인 상태일 때 윤리와 도덕이 의미가 있음을 잠시 망각했었습니다. 도사님의 망치를 겪고 하니 스스로 겸손해지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결론입니다. 과연 나만의 본진은 무엇일까요? 저는 아직 그 본진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길 좋아하지만 저만의 Keyword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직접 손으로 만들어보고, 몸으로 체험해 보고, 나의 가슴이 끌리는 경험을 해보려 합니다. 저는 송길영 작가가 말하는 '호명'이 누군가에게 불린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부른다는 뜻으로 읽혔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불리기 위해 나의 본진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기준으로 '충실함'과 '깊어짐'이 있어야만 비로소 과도한 시뮬레이션에서 벗어나 온전한 삶을 찾아낼 수 있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호명'은 바로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평소 직업적 삶에 매몰되다 보면 그 안에서의 삶이 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변화에 대한 적응은 지체되고, 오로지 조직의 논리와 주변 사람들만이 내 세상을 채우게 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송길영 작가의 책을 읽고, 그 와의 Q&A를 하는 시간을 통해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한 발짝 떨어져 조망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앞선 책들도 그런 모습이 있었지만 이번 시대예보가 특히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시대예보"가 하나의 시대를 진단하는 시리즈가 되길 바라며, 또 하나의 '호명'을 만들어주신 도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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