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탈출 재난
여러 단편과 <다찌마와 리>의 연출부를 거친 이상근 감독의 장편 데뷔작, <엑시트>가 선을 보였습니다. 작은 시장 규모에 영 보기 어려운 장르인 탓인지, 무려 4DX와 아이맥스 포맷 개봉을 확정지으며 홍보 포인트로도 활용하고 있네요. 조정석과 소녀시대 윤아를 주인공으로 고두심, 박인환, 김지영, 강기영, 배유람 등이 출연했죠. 규모가 규모인지라 제작비도 130억 원이 들어갔습니다.
졸업 후 몇 년째 취업 실패로 눈칫밥만 먹는 용남. 온 가족이 참석한 어머니의 칠순 잔치에서 친지들 얼굴 보기도 부끄러운 와중, 연회장 직원으로 취업한 동아리 후배 의주를 만납니다. 어색한 재회도 잠시, 시내 한복판에서 의문의 연기가 피어오르며 순식간에 도심은 일대 혼란에 휩싸이게 되죠. 유독 가스로 뒤덮인 빌딩 숲에서 용남과 의주는 산악 동아리 시절 쌓아 뒀던 모든 내공을 동원해 탈출을 시도합니다.
재난, 공포, 좀비 등 색이 강렬한 장르에 코미디를 끼얹는 시도는 대부분 작품성과 상업성을 맞바꾸는 결과를 맞이합니다. 한 줄 한 줄의 대사부터 전달하려는 메시지까지 유머에 희석되는 탓이죠. 하지만 그 덕에 가볍게 지나간 뒤에도 뇌리를 묵직하게 때리는 두 번째 기회를 얻기도 하는데, 그 묵직함은 관객들의 일상에 맞닿아 있을 때 최대한의 폭발력을 냅니다.
<엑시트>는 기본적으로 재난 영화입니다. 두 명의 청춘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진앙지로부터 열과 성을 다해 도망치고 또 도망칩니다. 그런 그들을 달리게 하는 것은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일념 하나뿐이죠. 지진이 일어난다는 재난 문자에 용남은 코웃음을 쳤지만, 만년 취준생으로 사는 바로 지금이 재난이라는 친구의 조언이 문득 생각납니다.
분명한 목적 하에 설계된 무대입니다. 한 명은 게으른 몰골로 집안의 눈엣가시로 전락했고, 다른 한 명은 알바나 다름없는 직장에서 상사에게도 시달리죠. 그런 그들이 자신과 타인 모두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광경으로 일종의 응원 내지는 찬사를 보내고 싶었을 겁니다. 조정석과 윤아의 이미지를 활용한 웃음과 의외의 아드레날린으로 반전을 꾀했을 거구요.
그런데 영화는 또 다른 욕심으로 그렇게 공들인 판을 내버립니다. 바로 재난이라는 소재 탓이죠. 재난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합니다. 누구의 어떤 개성도 설 자리를 잃습니다. 비닐봉지와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벽을 타며 빌딩 사이를 뛰는 사람에게서 '오늘 하루 있는 힘을 다하는 취준생'의 향기는 가스의 분출과 동시에 사라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들이 생존을 위해 활용하는 스스로의 재능은 암벽 등반 동아리가 남긴 체력과 기술뿐입니다. 취준생이든 대기업 직원이든, 상사에게 시달리든 행복한 직장인이든, 남녀든 노소든 그저 뜀박질만 잘 하고 벽 타는 기술만 있으면 누구든 용남과 의주를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죠. 대부분의 재난 영화가 가족애라는 근본적인 속성에 집중하고, 튼튼한 몸이든 비상한 머리든 재난 상황에 특화된 직업군에 몰려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손으로 날려 버린 의의의 자리엔 한껏 과장된 웃음만이 버티고 서 있습니다. 감정의 세기를 목소리와 몸짓의 크기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조연들은 희로애락을 연출하는 방청객에 그치죠. 재난 상황의 모든 가능성을 배제한 채 더 높은 곳으로 더 빨리 달려가는 데에 모든 자원을 쏟아붓는 단순함이라면 썩 자연스러운 조합입니다.
신선함의 척도로만 보면 당연히 온갖 최초 타이틀은 죄다 가져갈 것이 당연합니다. '한국형'이라고 적힌 머리띠를 동여매고는 N포 세대부터 인터넷 방송까지, 눈길이 닿는 모든 곳의 재료들을 등에 짊어졌죠. 하지만 진지함과 웃음 사이에서 휘청이는 외줄을 타며 머나먼 바닥으로 하나둘씩 떨어집니다. 결국 남은 것은 흔하고 실망스러운 그 때 그 익숙함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