깎지 않고 기다려 맞춘 조각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이후 3년만에 돌아온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 <브로커>입니다. 송강호, 강동원, 배두나, 이지은(아이유), 이주영을 주인공으로 러닝타임 곳곳을 채운 카메오들도 함께하죠. 이번에 열린 제 75회 칸 영화제에서 송강호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국내 개봉도 마침 영화제 직후인 6월 8일에 이루어졌구요.
거센 비가 내리는 어느 날 밤, 교회 베이비 박스에 갓 태어난 아기가 들어옵니다. 세탁소를 운영하지만 늘 빚에 시달리던 상현과 교회 보육 시설에서 일하는 동수는 둘이 함께 당직을 서는 타이밍을 틈타 아이를 빼돌리죠. 그러나 바로 다음 날 아기의 엄마 소영이 아이를 찾으러 돌아오고, 경찰이 무서워 자신들의 부업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사람들과의 조용한 동행이 시작됩니다.
일상 속에서 발견되는, 독특하지만 왜인지 눈길을 뗄 수 없는 유대를 다룬다는 점에서 <브로커>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이전에 선보였던 작품들과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뉴스 헤드라인으로만 접하면 손가락질받아도 모자랄 사람들의 사연을 한 땀 한 땀 뜯어내 잔잔한 흐름으로 흘려보내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을 마냥 미화하거나 덮으려는 억지는 딱히 느껴지지 않는 것이 큰 매력이죠.
당장 주인공인 상현과 동수만 해도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일하는 둘은 베이비 박스에 아이가 들어오자 자신들이 당직을 서고 있었다는 점을 이용해 CCTV 기록을 삭제하고 아이를 빼돌립니다. 빼돌린 아이는 수천만 원에 거래되죠. 그런데 영화는 이 둘을 이상하리만치 당연하고 아무렇지 않게 바라봅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보다 보면 지금 이 사람들이 내가 생각하는 그 나쁜 짓을 하는 게 맞나 싶을 정도죠.
여느 영화였다면 음습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암거래로 묘사해야 맞는 상황이지만, <브로커>는 이 첫 번째 장면으로 영화의 영점을 조절합니다. 앞으로 보게 될 광경은 도덕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옳지 못한 것들이 수두룩할 예정이나, 우리는 그것들을 이렇게 보여주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죠. 실제로 그 잣대를 들이댄다면 <브로커>에서 곱게 볼 수 있는 인물은 쉽게 대기 어렵습니다.
이제 뭐라고 하는 사람이 바보인 준비를 끝냈으니 보여주려고 준비한 것들을 온전히 꺼내놓기만 하면 됩니다. <브로커>의 주인공 무리는 팔아넘길 아이를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입니다. 아이를 훔친 사람들, 아이의 친엄마, 보육원에서 탈출한(?) 아이, 그런 그들을 남몰래 쫓는 형사들까지. 어느 모로 보나 도대체 이게 무슨 조합인가 싶은 인물들이 모여 한 줄씩 써내려간 문장이 하나의 책이 되는 구성이죠.
사실 구성원들 소개가 끝나면 이후의 그림은 충분히 예측 가능합니다. 각자의 상처와 아픈 과거를 이유로 세상과 완전히 어울리지 못했던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향기를 풍기는 사람들의 곁에서 이것이야말로 바로 인생이 아닐까 하는, 기분좋은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죠. 세차장이나 우산 등 스스로도 알지 못한 순간에 유대감이 피어나는 에피소드들이 영화의 무기가 됩니다.
전체적인 각본보다는 순간의 연출이나 그를 가능케 하는 배우의 힘이 더 큰 영화입니다. 애초에 커다란 하이라이트나 극적인 반전을 기대할 구성 자체가 아니기도 하구요. 때문에 영화보다는 드라마 시리즈의 축약본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죠. 그 빈 자리를 조금이라도 메우고 싶었는지 상업 영화의 티를 내려는 손짓이 이따금씩 포착되는데, 나머지와 약간의 이질감을 띠기도 합니다.
아이의 아빠를 둘러싼 뒷이야기가 대표적인 예시가 되겠죠. 굳이 미망인을 비롯한 새 인물들을 직접적으로 등장시키지 않더라도 대화만으로 얼마든지 설명이 가능한, 나아가 설명이 이미 끝난 이야기를 불필요하게 잡아늘린 느낌이 강합니다. 이것도 어떻게든 연결고리에 넣고자 상현이 원래 알던 친구 아들을 매개로 집어넣는데, 이 정도면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죠.
또한 감독의 국적을 알고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그래서 그렇게 보이는 건지 미묘한 교훈적 순간들도 있습니다. 불을 끄고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장면, 기차가 터널을 지나며 바뀌는 빛과 소음을 이용하는 장면, 관람차에서 눈을 가리고 이야기하는 장면 등 한없이 문학적으로 격앙된, 돌려 말하자면 작위적인 장면들이죠. 스틸사진에 문구 새기면 오늘치 인스타그램 하나 뚝딱입니다.
영화에 한없이 몰입했거나 본인이 정말로 저런 상황에 놓였다면 우연한 분위기에 취해 나올 수도 있는 장면들이지만, 인물과 장소의 배치가 해당 장면을 위해 공들여 계산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몰입은 영 쉽지 않습니다. <브로커>는 그런 장면들을 잊을 만하면 넣는 통에 한두 번만 있어도 쉽지 않은 몰입을 나서서 더욱 어렵게 만드는 편이죠.
장점들은 예상되어 그 존재감이 응당 받아야 하는 정도보다 크지 않은 반면, 단점들은 예상치 못했던 것들이라 실제보다 더 크게 보입니다. 감독부터 출연진까지 걸린 이름들이 워낙 크다 보니 감수할 수밖에 없는 위험이죠. 감독과 배우들에게 익숙하고 또 기다렸던 팬들에겐 충분한 호응을 이끌어내겠지만, 둘 다 아닌 사람들이 품어 버린 기대를 책임지리라고는 단언하기 어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