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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 리뷰

사설에 흘러넘친 비극

by 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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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

(Mary Queen of Scots)

★★☆


여러 극장들의 예술 감독들을 거치며 무대와 공연 기획 베테랑으로 거듭난 조시 루크가 할리우드 감독으로 데뷔했습니다. 마고 로비, 시얼샤 로넌을 주연으로 벌써 아카데미 시상식 2개 부문(분장상, 의상상)에 노미네이트된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죠. 엘리자베스와 메리 스튜어트를 맡은 두 주인공 외에도 가이 피어스, 잭 로든, 데이빗 테넌트, 젬마 찬 등 익숙한 얼굴들이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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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1년,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19살 메리 스튜어트는 남편의 죽음에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이복 오빠 모레이의 비호를 받으며 궁에 입성하지만, 그녀에겐 그보다 훨씬 큰 벽이 기다리고 있었죠. 바로 잉글랜드의 여왕이자 사촌지간인 엘리자베스였습니다. 정통한 왕위 계승자인 메리의 등장으로 위기감을 느낀 엘리자베스와 귀족들은 가능한 모든 정치적 수단을 동원해 그녀를 조이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를 자신만의 시각으로 재구성하던 중, 문득 역사서에 적혀 있지 않은 빈 공간을 상상력으로 채워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 충무로만 해도 조선왕조실록 구석의 중의적인 문장 한두 개에서 출발한 사극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죠. 실제로 일어났는지는 이제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앞뒤 문맥을 고려했을 때 있음직했던 순간. 그렇게 탄생하는 특정한 '명장면'은 해당 인물들을 향한 감정을 통째로 바꿔놓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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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국 역사를 소재로 한 문학, 영화,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며 그만큼 다양한 해석과 묘사가 있어 왔던 두 여인의 이야기를 또 꺼내려면 최소한 그 정당성은 확보해야 하겠죠. 메리 스튜어트의 비련함을 극한으로 끌어올리고, 그녀가 겪어야 했던 선천적이고 후천적인 좌절을 가능한 모든 방면으로 찾아다닙니다.


초반부의 메리는 자신의 신분과 처지를 분리할 용기를 지닌 인물로 묘사됩니다. 존 녹스를 비롯한 잉글랜드의 권력자들은 그녀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녀를 눈 앞에서 치우기 위해 모략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메리는 청교도의 국가에 나타난 카톨릭이었고, 프랑스에서 자랐기에 영국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주장을 펼치기에도 쉬웠습니다. 그럼에도 메리는 순간을 위해 허리를 굽히는 일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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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조와 고집은 한 끗 차이입니다. 보통은 결과가 좋으면 과정이 미화되는 식입니다. 하지만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는 고집을 지조라 우기는 고집을 부립니다. 잉글랜드 도착 초기에 보여준 메리의 강단은 연인 헨리 단리가 등장하며 10대 소녀의 무모함으로 돌변합니다. 메리의 빈틈을 호시탐탐 노리던 사람들에겐 절로 굴러들어온 거대한 기회였고, 아니나다를까 메리는 안과 밖으로 무너집니다.


후반부에 접어들면 영화의 뒤틀린 시선이 본격적으로 드러납니다. 메리가 얄궂은 운명과 음모의 희생양이라는 대전제를 견지하기 위해 무리수를 던집니다. 헨리 단리와의 어긋난 사랑마저도 남편의 명예만큼은 끝까지 지켜 주려던 고고함으로 각색되고 포장됩니다. 자신을 아끼는 사람들의 진실된 조언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후 그 사람들의 타락함을 강조하며 메리의 결정엔 문제가 없었다는 눈속임으로 마무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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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엘리자베스의 존재감과 역할은 메리와 함께 차지한 포스터가 무색한 수준입니다. 후반부에 사실상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라는 영화의 목적이나 마찬가지인 장면이 등장하는데, 메리의 정치와 사생활까지 파고들던 영화가 갑자기 두 인물을 병렬 배치하는 구성은 연출 욕심이 개연성을 앞선 순간입니다. 직전까지 내내 보여주던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마치 처음 공개하는 듯 만지작거리는 카메라도 뜬금이 없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칭송받는 여왕임에도 여인이 되고 싶었고, 메리는 젊고 아름다웠음에도 위대한 군주가 되고 싶었습니다. 아마 각본의 출발점이 된 문장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제한된 시간 동안 메리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사족까지 늘어놓았고, 이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자 엘리자베스를 꺼내 급하게 매듭을 지은 꼴입니다. 한 명과 두 명 중 누구의 것도 아닌 이야기가 되어 버린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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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는 여왕과 여인 사이에서 표류하고, 사실과 상상 사이에서 표류합니다.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관객들이 그를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 자만합니다. 수백 번 반복된 사설의 수십 번째 새로운 시선이라는 의의는 가져가겠지만, 그럴 가치를 증명해내지는 못했습니다. 이미 완성된 것을 다르게 접근하려다가 무위에 그친 수많은 사례들 중 하나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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