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가 찍은 특이점
<블랙 미러> 시리즈의 신작 소식은 항상 반갑습니다. 비록 넷플릭스로 넘어오면서 어딘가 원액(?)의 맛이 사라진 것만 같았지만, 시리즈 제목에 딸린 명성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죠. 그러던 중 작년 말에 <밴더스내치>가 발표되었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왔던 괴물 이름이 붙어 있었던 것은 물론, 포스터엔 'movie'나 'film', 'series'가 아닌 'event'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밴더스내치>는 <덩케르크>로 데뷔한 핀 화이트헤드와 <메이즈 러너>의 윌 폴터가 주인공을 맡았습니다. 1984년을 무대로 한 게임 개발자가 자신이 낸 탁월한 아이디어를 토대로 개발을 시작하며 출발하는데, 여기서부터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화면이 펼쳐집니다. 등장인물이 일정한 선택지를 마주할 때마다 시청자가 그들의 선택을 대신할 수 있죠.
아침으로 먹는 시리얼이나 출근길에 듣는 음악 등의 소소한 선택지도 있지만, 누르기에 따라 누군가의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광경까지 목격할 수 있습니다. 하나를 고른 입장에서 다른 하나의 결과도 궁금한 것이 당연지사, 정해진 러닝타임의 서너 배는 기본으로 써먹게 됩니다. 그렇게 <밴더스내치>는 포스터에 적힌 '이벤트'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죠.
결말은 선택하기에 따라 말 그대로 극과 극을 달리지만, 보통은 크레딧이 흘러나오는 엔딩을 진짜 엔딩으로 칩니다. 그를 바탕으로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파악해볼 수 있겠죠(물론 거기까지 다다르는 과정은 각기 다르겠지만요). <블랙 미러> 시리즈 특성상 어느 전개와 어느 결말도 딱히 희망차지는 않습니다. 반복되는 화면을 보다 보면 <웨스트월드>의 초반 에피소드들이 떠오르기도 하죠.
<밴더스내치>가 드라마나 영화가 선택지를 제공한 첫 번째 사례는 아닙니다. 아예 이를 주된 컨셉으로 잡아 인기를 끌었던 TV 예능 프로그램도 있었고, 경험했던 사례 중에서는 드라마 <하와이 파이브 오>의 한 에피소드가 공식 웹사이트에서 세 가지 결말을 모두 보여 주었던 적이 있었죠. 하지만 이처럼 수많은 가지를 실시간으로 선보인 것은 <밴더스내치>가 유일합니다.
넷플릭스는 극장 스크린의 역할을 TV나 컴퓨터 모니터로 축소한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아 왔습니다. 커다란 화면과 빵빵한 스피커를 노리고 만든 창작자들의 노고를 한낱 동영상 파일로 대체하려 한다고 말이죠. <밴더스내치>는 '넷플릭스만이 가능한' 첫 번째 컨텐츠입니다. 기성 극장들을 향한 넷플릭스의 자신감 어린 선언입니다. 말하자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증명해 보인 셈입니다.
앞으로 같은 컨텐츠가 양산되리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넷플릭스는 자신들의 팬들과 지지자들에게 <밴더스내치>라는 강력한 무기를 쥐어 주었습니다. 넷플릭스 영화나 드라마들은 일반 영화나 드라마들에 비해 구성이 어떻고 작품성이 어떻다는 주관적인 기준보다도 몇 배는 확실한 기준입니다. 영화를 보려면 극장에서 봐야지 왜 그 작은 걸로 보냐는 핀잔을 정면으로 막아낼 수단입니다.
업계 관계자들은 3D와 아이맥스, 4DX, 스크린X, 초당 프레임 수 등 수많은 방식으로 혁신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넷플릭스와 <밴더스내치>는 지독히도 근본적이었기에 모두가 전제로만 여겼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미래의 극장에선 상영관에 모두 함께 앉아서 각기 다른 화면을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종종 하곤 했는데, 이후 현실이 된다면 그 출발점을 <밴더스내치>로 잡아도 과장이 아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