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명한 기운 난사
<매트릭스> 이후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시리즈는커녕 한 편짜리 영화도 도통 찾지 못하던 키아누 리브스. 2014년 개봉된 <존 윅>은 한 때 잘 나갔던 배우를 앞세워 양산해내는 흔하디 흔한 B급 액션 시리즈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화끈하고 깔끔한 특유의 스타일은 순식간에 두터운 팬층을 형성했고, 어느새 3편까지 달려오면서도 승승장구를 거듭했죠. 국내 개봉은 본토보다 6주 정도 늦어진 시리즈 최신작, <파라벨룸>입니다.
콘티넨탈의 성역 안에서 피를 보았다는 이유로 파문된 존 윅. 파문과 동시에 700만 달러였던 현상금은 두 배가 되고, 누구의 공식적인 도움도 받을 수 없게 된 1400만 달러짜리 목표물은 전 세계 킬러들의 먹잇감이 됩니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은 존은 자신에게 빚을 지고 있는 과거의 인연들을 찾아나서지만, 최고 위원회 하이 테이블까지 개입하며 전쟁의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해집니다.
특정 배우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캐릭터들이 종종 있습니다. 휴 잭맨의 울버린, 라이언 레이놀즈의 데드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토니 스타크, 조니 뎁의 잭 스패로우 등이 대표적이죠. 마치 이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 태어난 듯한 싱크로율을 오랜 기간에 걸쳐 스스로 증명해냈습니다. 키아누 리브스의 존 윅은 수트를 갖춰입은 킬러라는, 얼핏 몰개성한 전형임에도 이 반열에 합류하는 데 성공했죠.
아끼는 강아지를 죽이고 차를 훔쳤다는 이유로 눈 앞에 나타나는 모든 사람들의 머리를 날려 버리는 존 윅의 행보는 새삼스러운 신선함이었습니다. 주인공이 혈혈단신으로 조직이나 기관을 통째로 무너뜨리는 전개는 많았지만, 존 윅에게는 그만의 특별한 세련됨이 있었죠. 그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것도 모자라 목숨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등,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빈 자리를 능동적으로 채워내게 하는 능력이 주된 무기였습니다.
이는 콘티넨탈, 하이 테이블, 금화, 바워리 등 킬러들이 몸담은 세계관을 탄탄하게 구축해낸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일상과 이렇게 가까이 닿아 있음에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세계가 주는 호기심과 짜릿함이었죠. 그 무시무시하고 잔혹한 킬러들이 자신의 목숨만큼이나 중히 여기는 규칙들은 이들에게 품격을 부여했습니다. 능숙하고 절제된 총기 액션은 이와 더없는 시너지를 냈죠.
그런데 절대적인 규칙과 집단들을 토대로 하는 각본은 자칫 자신만의 세계에 과몰입하는 실수를 저지르기 쉽습니다. 본인들은 한껏 진지한데도 그 모습 자체가 우습거나 민망한 경우가 왕왕 있죠. 1편이 이 모든 것을 소개하고 꺼내놓았다면, 2편은 그것들을 본격적으로 구체화했습니다. 그러면서 멋짐과 오글거림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었죠.
3편 <파라벨룸>은 모든 면에서 한 발 더 나아갔습니다. 현상금도 스케일도 거대해졌습니다. 지금껏 보여주었던 것들과는 다른, 어느 쪽으로든 '더'라는 수식을 붙일 수 있는 화면들을 준비했습니다. 액션의 도구도, 무대도, 상대도 덩치를 키웠습니다. 구성마저 이를 돋보이게 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비디오게임 스테이지를 넘어가듯 조건과 환경, 무기까지 달리하며 존 윅의 액션에 새로운 장을 추가합니다.
존의 머리를 노리는 전 세계의 킬러들과 맞서는 전개는 2편과 거의 동일합니다. 이를 통제하는 주체가 산티노라는 개인에서 하이 테이블이라는 절대자로 확대되었을 뿐이죠. 덕분에 더욱 다양하고 강한 적들을 상대하게 되었고, 맞먹는 힘을 갖추려 존의 과거에도 한 발짝 더 다가갑니다. 캐릭터는 캐릭터대로, 세계관은 세계관대로 확대하며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죠.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금의 존 윅 시리즈를 있게 한 장점들을 스스로 저버립니다. 액션만 해도 타격이 큽니다. 합 맞춘 티를 떨치지 못한 어설픈 맨몸 액션이 세련된 총기 액션의 자리를 필요 이상으로 가져갑니다. 많아야 두어 발이면 끝났던 싸움이 수십 수백 합을 넘어가며 반복되니 늘어지기도 쉽습니다. 개를 풀고 말을 타는 눈요기에 존 윅의 전설적인 명성은 뒷전으로 밀려납니다.
무대와 장면의 멋을 위해 개연성을 포기하는 순간도 눈에 밟힙니다. 총과 칼을 들고서도 굳이 멱살을 잡으려다가 죽어나가는 적들은 우습기만 합니다. 무엇보다도 직접 나오지 않은 덕에, 관객들의 상상에 맡겼던 덕에 특유의 신비함과 무게감을 가져갔던 설정들이 큰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하이 테이블의 장로와 심판관 등, 마땅한 내실 없이 패션 센스만 번지르르한 캐릭터들에 김이 팍 샙니다.
갑자기 바뀐 세계관의 방향성부터 확 끌어올린 화면의 채도까지, 영화 내내 감독이 바뀌었나 싶은 의심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대놓고 예고한 시리즈의 미래를 생각하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갔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흥행 쪽이야 1편의 네 배에 가까운 수익을 올리며 엄청나게 발전했으니, 잘 하고 많이 해서 유명해진 1편의 기틀을 조금만 더 생각해 주었으면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