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는 힘에는 크는 책임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지나간 자리에 아기 거미가 가장 먼저 돌아왔습니다. 2017년 <홈커밍>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다른 영화들에도 개근하며 꾸준히 만난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이죠.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피터 파커 역으로 6편씩이나 계약했다고 했었는데, 언제 다 나오나 싶더니 벌써 한 편밖에 남겨두고 있지 않다고 하네요.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으로 인류의 절반이 5년의 공백을 겪은 이후, 16살과 21살이 공존하게 된(!) 고등학교의 혼란은 더욱 큽니다. 다시 학생으로 돌아와 학업에 매진하던 피터는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나죠. 그런데 그 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력한 괴물들을 마주하고, 이내 모두가 '미스테리오'라고 부르는 의문의 영웅과 닉 퓨리까지 합세하며 피터의 여름은 다시 한 번 피곤해집니다.
톰 홀랜드의 피터 파커, 제이콥 바탈론의 네드, 젠다야의 MJ, 마리사 토메이의 메이, 존 파브로의 해피 등 1편의 주역들이 대부분 돌아왔습니다(벌쳐와 리즈가 언급조차 되지 않는 건 조금 의외입니다). 거기에 사무엘 잭슨의 닉 퓨리와 코비 스멀더스의 마리아 힐이 숟가락을 얹었고, 완전히 새로운 얼굴로는 제이크 질렌할과 레미 히, 누만 아카(하킴!)가 합류했죠. 이제 솔로 영화도 복작복작합니다.
<어벤져스> 시리즈가 첫 번째 완결을 맞이하면서, 마블 유니버스는 스스로의 잠재력과 가능성이 그야말로 무한함을 증명해냈습니다. 전 우주 생명체의 목숨을 걸고 거의 100명에 달하는 주조연들을, 마음만 먹으면 한 명 한 명의 영화를 만들어낼 수도 있는 캐릭터들을 하나의 장면에 엮어냈죠. 최소한 규모 면에서 당분간 다른 영화가 <엔드게임>을 뛰어넘기는 매우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이 파괴력은 같은 집안 식구들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토록 대단한 것을 경험한 관객들의 눈높이와 흥미를 다시 한 번 사로잡으려면 전혀 새로운 종류의 매력을, 그것도 웬만한 수준 이상의 성의로 무장시켜야 하죠. 오랜 역사 덕에 대부분의 자잘한 개성까지 예습이 되어 있는 스파이더맨과 피터 파커는 <엔드게임> 직후의 부담감을 짊어지기에 최선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파 프롬 홈>은 피터 파커의 이야기와 마블 세계관의 이야기를 동시에 진행시킵니다. 벤 삼촌을 잃은 피터는 사실상 그의 자리를 대신한, 어쩌면 마음 속 자리는 그보다 더욱 컸을지 모를 지주를 잃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세상은 그 사람의 역할과 존재감을 자신에게 요구합니다. 그 혼란 속에서도 사춘기 소년의 심장은 두근두근 뛰고,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짐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은 더욱 굴뚝같아집니다.
이처럼 하루라도 빨리 그저 친절한 이웃과 평범한 고등학생 사이의 누군가로 돌아가고 싶은 피터의 앞에 의문의 남성이 나타납니다. 똑똑하고 강한 어른입니다. 기구한 사연과 상처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을 다잡았고, 영웅들의 활약이 필요한 위기에 홀로 맞설 힘과 의지도 지니고 있습니다. 피터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완벽한 기회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셈입니다.
흥미롭게도 관객들에겐 이 모든 과정이 나름의 매력을 지닌 눈요깃거리가 됩니다. 사랑에 눈을 뜬 피터의 모습은 사랑스럽고, 여전히 활약하는 스파이더맨의 모습은 멋집니다. 마블 유니버스 설정의 기술력을 만나 한층 진화한 스파이더맨의 액션은 다른 영웅들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독자적 영역입니다. 캐릭터는 물론 영화에 이르기까지, 마블의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성장을 거듭합니다.
덕분에 4DX 포맷은 대작의 사례로는 이례적으로 아이맥스보다도 대단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거미줄에 매달려 허공을 질주하면서도 몸으로 직접 해결하는 액션이 대부분이고, 4DX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물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괴물까지 등장하며 거의 완벽한 조건을 자랑하죠. 아이맥스에 비하면 좌석 공급도 지나치게 한정적이라 예매 대란도 하루하루 이어지고 있습니다.
벌쳐의 쫄쫄이와 깃털을 최첨단 기계로 대신한 경험 덕인지, 미스테리오의 어항마저 세련된 때깔로 바꾸는 마법을 부립니다. 원작의 설정을 21세기와 세계관에 맞추어 영리하게 각색했죠. 제이크 질렌할의 연기는 자칫 뻔할 수 있었던 캐릭터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일등공신이구요. 가짜 뉴스와 미디어의 힘을 비롯, 가진 재료에서 파생되는 가능성과 메시지 하나하나도 살핀 듯한 접근도 훌륭합니다.
물론 설정과 설정, 장면과 장면 사이를 거미줄로 성기게 이어붙인 지점도 많습니다. <파 프롬 홈>마저도 피터의 성장을 다루고 있다고는 하지만, 갑자기 보통의 10대 소년 기준으로도 무책임한 행동을 일종의 개그 내지는 아주 중요한 전환점으로 삼는 장면이 종종 나오죠. 특히 정신적 지주의 유산이자 말 그대로 인류의 생존을 좌지우지하는 안경을 다루는 모습은 지금까지의 개성에 정면으로 대립합니다.
마블 스파이더맨의 고질적인 문제인, '피터 파커로 우뚝 서는 스파이더맨'의 모습은 여전히 함량 미달입니다. 이는 영화에서 피터 파커를 아이언 맨의 후계자 후보로 삼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타인의 눈치와 그림자에 휘둘리면서도 결과론으로 만족하는, 부족한 자존감의 문제죠. 심지어 <파 프롬 홈>은 이 주체로 토니 스타크에 닉 퓨리까지 더한 것도 모자라, 피터를 아예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제는 더더욱 비판이나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마저도 마블표, 톰 홀랜드표 스파이더맨의 새로운 정체성으로 자리매김한 것이죠. 토비 맥과이어가 원작 코믹스에 가장 가까운 스파이더맨이었고 앤드류 가필드가 시각적으로 가장 훌륭한 스파이더맨이었다면, 톰 홀랜드는 이제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에 가장 어울리는 스파이더맨입니다. 이렇게 단일 영화와 스파이더맨 시리즈, 마블 유니버스 시리즈라는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달성한 것만으로도 <파 프롬 홈>의 성과는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