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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쿠르 코치 김지호 Nov 06. 2023

파쿠르 수련자가 자본주의에서 살아남는 법

오늘은 돈 얘기 좀 하겠다. 사실 돈 얘기를 공개적으로 하는 것은 처음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살기를 원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파쿠르가 단순한 취미를 넘어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된 것은 신체적, 정신적 자유를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유를 원하고, 자유를 인식할 수 있는 이유는 자유롭지 않은 상태에 놓여있어서다. 친구 경덕이의 말을 인용하자면 부재(不在)가 존재를 드러낸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경계에 있는 상태를 ‘장애물’이라 표현한다. 벽, 난간, 도로 등 물리적인 장애물을 넘어서 두려움, 욕망 같은 정신적인 장애물을 포함한 개념이다.


 그렇다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가장 거대한 장애물은 무엇일까? 모름지기 가장 큰 장애물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어서 일상에서 그게 장애물인지조차 모르며 살아간다. 깊은 밤, 오징어잡이 배의 집어등 불빛인 줄 모르고 미친 듯이 모여든 오징어들처럼 말이다. 유하라는 시인은 <바람 부는 날이면 앞구정동에 가야 한다>에서 여는 시를 다음과 같이 썼다.



<오징어>


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우리를 유혹하는 저 빛은 구원의 빛처럼 보인다. 섹시한 식스팩 복근부터 백화점 1층을 차지하는 명품까지, 빛이 제시하는 길을 가장 충실하게 믿고 따르면 빛에 가장 가까이 닿을 수 있다. 사람들은 의아해하겠지만 자본주의는 세속화된 종교가 갖는 형태, 기능을 그대로 닮았다. 실제로 발터 벤야민을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이 그렇게 말한다. 자본주의를 뜻하는 캐피탈리즘(Capitalism)을 분석해 보자. 가축(Cattle)과 자본(Capital)은 어원이 같다. 제러미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에 따르면 가축은 최초의 움직이는 재산이었고, 서로 교환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표준 매체였으며, 사람이나 영토를 지배하는 힘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도구였다.


 근대 자본주의는 가축이 상품과 화폐로 구별되어 통용되는데 화폐가 화폐다우려면 종교와 마찬가지로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종이나 숫자가 단지 숫자를 넘어서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것을 교환할 수 있다는 가치로 판단된 순간 사람들은 개종된다. 그렇다면 상품과 화폐 중 어느 것이 더 우위에 있을까? 다시 말해서 상품과 화폐 중 어떤 것이 인간에게 더 자유를 주는가?


 단연 화폐다. 화폐를 가진 자는 여러 상품을 구매할 기회와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 반면, 상품을 가진 자는 어떻게든 화폐를 얻기 위해 애를 쓴다. 자연스럽게 돈을 가진 자와 돈을 벌려는 자로 위계가 분명해진다. 그래서 화폐가 없는 사람은 화폐를 벌기 위해 스스로 상품이 되어야만 한다. 학벌, 취업, 커리어 쌓기, 인플루언서 활동, 헬스장, 치킨집 등 흔히 ‘자기 계발, 노동, 공부, 일, 자영업’이라 부르는 것들은 화폐를 가지고 있는 자를 만족시켜주기 위해 자기 자신을 최선을 다해 ‘상품화’하는 행위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자유’는 상품을 소비할 자유, 즉 내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돈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신영복 선생님은 <담론>에서 인간은 ‘빵 없이 살 수 없지만, 빵 만으로 살 수도 없다.’고 말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 없이 내가 좋아하는 파쿠르를 할 수 없다. 하지만 돈만 추구해서도 파쿠르를 할 수 없다. 자본주의를 통제하지 못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획일화된 노예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돈은 수단일 뿐이다. 돈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은 수십억을 준다해도 노예일 뿐이다.


 

흔히들 파쿠르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바탕을 둔 움직임의 예술이라 한다. 그러나 정말 ‘자연’스러웠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똑바로 걸어가면 되는데 벽 타고 건너뛰고 힘든 물구나무를 서고 바닥을 네발로 긴다. 파쿠르는 편한 길로 가려는 인간의 본능을 거슬러 굳이 위험하고 불편한 곳으로 건너가는, 철저한 극기의 행위이다. 이렇듯 인간의 위대한 힘은 자연을 거스르고 동물로서의 본성을 역행하는 데서 온다.

 

 대표적으로 사랑이 그렇다. 인간은 분명 자신이 손해 보는 일이거나 생존 욕구와 반대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누군가를 기꺼이 돕는다. 사랑은 인간의 원초적 욕구를 극복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자신다울 수 있는 힘을 준다. 사랑은 자연스러운 것, 욕구에 충실한 것이 아니다. 자연의 순리대로, 욕구대로 살면 사랑은 불가능하다. 자본주의 역시 욕구대로 살면 극복하기 어렵다. 입으로 먹고 항문으로 싸는 생리적인 현상이 인간의 삶에서 가장 많은 반복이 이루어지는 사건이지만 그것이 인격적인 의미가 느껴지지는 않는 이유는 자연의 순리를 거슬러 존재와 세계에 ‘변화’를 야기할 수 있는 인간의 고유함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전체주의를 경계한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가치 - 노동(일), 작업(예술), 행위(사랑, 공감)는 생리적인 것을 거스를 때만이 비로소 지속될 수 있다. 악의 평범성은 익숙함, 당연함 속에서 자란다. 자본주의가 망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사람들이 취업도 안 하고 소비도 안 하면 된다. 재밌게도 우리 사회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러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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