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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훈 Aug 20. 2021

'인정'받길 포기하니 삶이 홀가분해졌다

20210820


“인정받는 삶만이 행복한 삶은 아니다.”




체내에 마그네슘이 부족하면 눈밑에서 경련이 일어나듯, 우리 몸은 특정 영양소가 결핍되면 그에 상응하는 화학반응이 일어나도록 설계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결핍은 인정을 갈구하는 반응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예술가는 장르를 불문하고 반드시 관객이 있어야만 소비가 이루어지는 유형 또는 무형의 제품을 생산하는 직업이다. 즉, 적정 수준의 ‘인정받음’은 선택이 아닌 필수에 가깝다. 반면, 샌드위치를 만드는 시급제 아르바이트생이 주문한 손님에게 ‘이 친구 샌드위치 하나 기가 막히게 만드는 구만’이라는 칭찬 섞인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샌드위치를 마저 만들지 못할 이유는 없다. 어차피 그 아르바이트생은 시급제라는 약속된 자본논리 하에 노동력을 제공할 뿐이니까.


하지만 예술가에겐 약속된 그 무언가가 없다. 사력을 다해 샌드위치를 만들어 낸 예술가가 유일하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인정뿐이다. 人情.




만약 그대가 여기까지 읽었다면 ‘아니, 작품 판매가 이루어지면 큰돈을 벌 수 있지 않느냐’라는 의구심을 품을 수 있으리라 본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작품 판매는 시급제처럼 약속된 자본논리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만 한다. 한마디로, 판매란 반지의 제왕 속 프로도의 임무에 버금가는 고단한 여정에 대한 최종 보상이다. 영화 속 프로도는 그나마 ‘샘 와이즈 갬지’라는 든든한 비상식량. 아니, 조력자라도 있었지만 현실에선 혼자 힘으로 외로운 산을 올라 유혹을 이겨내고 반지를 파괴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바로 작품 판매다.

반지의 제왕 3편 속 프로도(2003)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보자.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들의 행보는 매우 높은 확률로 암담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우선 자신보다 처지가 나은 동료 예술가를 타겟으로 정한다. 처음엔 장난 섞인 질투와 시기로 시작해서 자제력이 부족한 몇몇 예술가들은 비방과 선동이란 죄악에 이르기도 한다. 아무리 인정에 목마르다지만 그 누구도 이러한 행동을 하는 인간이 되고 싶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둘 중 하나다. 인정받는다는 것 자체에 대해 무감각해지거나, 무슨 수를 써서든 지금 당장 인정을 받거나.




오랜 고민 끝에 나는 전자를 택했다. 그 선택이 가져다준 보상은 생각보다 다양했고 쏠쏠했다. 가장 강력한 보상은 이전보다 더 스스로에게 집중 할 수 있게 된 것에 있다. 비록 약간의 어그로를 위해 제목엔 ‘포기’라고 묘사했지만, 정확히는 감각이 무뎌지는 기술을 연마했다는 표현이 맞다. 나는 그 기술에 ‘한귀한흘’ 이란 이름까지 붙여줬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생각보단 흔한 기술인데, 정작 실천하기엔 쉽지 않은 편이다. 해보면 알 거다.


오늘이 가져다 줄 미래는 꽤나 값질 것이라 본다. 당장 받지 못한 약간의 인정 때문에 스스로에게 죄악을 저지르는 건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니 명심하자. ‘한귀한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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