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회복을 위한 사할린 동포

우리 민족의 디아스포라! 민족 자부심과 한글의 정체성을 회복하자

by 김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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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사할린 망향의 탑에서



역사 회복을 위한 사할린 동포의 호소

우리 민족의 디아스포라! 민족 자부심과 한글의 정체성을


사할린은 러시아 동부, 사할린섬과 쿠릴 열도로 이루어진 주.

오호츠크 해에 있는 섬으로 하바롭스크 지방의 한 주(州)를 이루며, 북부에는 석유가, 남부에는 석탄이 풍부하다. 러일전쟁 후 사할린섬 남반부(북위 50도 이남지역)는 일본 영토로 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가 점령하였다.


전체 인구 약 55만 명이며 100여 민족 이상이 살고 있으며, 그 중 한인이 5.4%로 러시아인 다음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사할린은 우리 선조들의 독립운동의 터전이었다. 일제 강제징용의 애환이 서려있는 역사적인 곳이다. 특히 안톤 체홉이 지금으로부터 127년 전에 이곳에 머물면서 자신의 문학적 성찰을 성취한 곳이다.

체홉은 1890년 시베리아와 사할린 섬 여행 이후 인간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사할린 섬>이라는 여행기를 발표했다. 현실의 삶과 꿈꾸는 삶의 이중성을 그린 희곡 <갈매기>로 연결되어 극작가로서의 탄탄한 기반을 구축하게 된다.

인구 19만의 주도인 유즈노 사할린스크에는 이러한 인연으로 체홉의 동상들이 즐비하며 그의 명칭을 단 극장과 박물관, 거리가 있다고 한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강제 동원돼 사할린에 배치됐던 사람들과 후손들을 사할린 한인이라 부른다. 한인들은 해방을 맞았으나 일본, 소련은 물론 조국의 무관심 속에 타향에 방치됐다. 귀국의 꿈을 위해 소련국적을 거부하고 무국적자로 남은 한인들은 우리 민족 특유의 성실함과 교육열로 차별과 멸시를 극복하면서 귀국하고자 애써왔다.

사할린 한인의 이주역사는 반복되는 슬픔의 연장선에 있다.

강제동원에 의해 고향의 가족들과 첫 번째 이산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할당모집, 국민징용, 관알선의 방식으로 우리 민족 780만 명을 전쟁과 군수공장으로 강제 동원했다. 이 중 가족을 포함하여 사할린으로 이주된 한인은 4만3000여명에 이른다. 이들은 탄광, 벌목장, 제지공장 등에 배치되어 가혹한 노역을 했다.


두 번째 이산은 패망을 목전에 둔 일제가 1944년 사할린의 탄광과 공장 등 생산시설과 노동력을 일본으로 철수 시켰다. 이 때 큐슈지방으로 한인 3,000여명을 이동시킨 것이다. 사할린 가족과 두 번째 이산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1945년 이전 출생자와 배우자에 한정된 영주귀국으로 4,300여명의 1세대들이 가족과 헤어져 현재 세 번째 이산을 겪고 있다.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았지만 한인들은 모국의 무관심과 소련정부의 탄압 속에서도 귀국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또한 일본의 양심세력과 함께 사할린 한인들의 영주귀국과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사할린 동포들은 각종 신분증과 다양한 직업군의 사진, 조선학교, 한글 교육사업, 사할린 우리말방송국 등을 통해 무국적자로서의 힘든 삶 속에서 모국어와 민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했다.

한인들은 90% 이상이 남한 출신으로 귀국을 위해 소련국적을 취득하지 않고 무국적자로 남았다.

사할린 선주민은 중앙아시아에서 파견된 고려인들을 큰땅백이, 북한에서 유입된 노동자들을 파견노무자라 부르며 반목과 화합을 반복하며 성장했다.

무국적 한인들은 건축현장의 막일, 바느질, 시장의 노점으로 생활하면서 같은 출신지역끼리 또는 같은 성씨끼리 계를 조직하여 서로를 위로하고 의지하며 살아왔다.

자녀들에게 모국어와 민족문화를 가르치기 위해 조선학교를 설립했다. 1963년 조선학교가 폐쇄된 후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글교육이 다시 활발하게 일어났다.


사할린에 방치된 눈물의 고려인들


제 2차 세계 대전 종료 시까지 일본군국주의 정책에 의해 탄광, 철도 및 공항건설, 석유채굴 등으로 징용되어 사할린으로 끌려간 한인들이 23,498명이었으나 전쟁 종료시 일본인 27만 명은 자국으로 이송되었으나 국적 상실된 한인들은 졸지에 사할린에 방치되고 말았다.


그 후 국제적십자사 및 러시아정부와 꾸준히 협의하여 연세가 많은 한인들을 중심으로 고국인 한국으로 돌아와서 정착하고 있어 그나마 한을 풀고 있다할 것이다


현재 4300여명의 사할린 한인들이 국내 22곳의 시설에 영주 귀국하여 정착했다. 1992년 사할린 독신한인 72명이 춘천으로 영주 귀국한 이후 영주귀국자들은 부부 또는 친지와 짝을 이룬 동거의 형식으로 들어와 생활하고 있다.


그러나 1945년 8월15일 이전 출생자와 그 배우자, 장애를 가진 자녀만 영주귀국이 가능해 사랑하는 사할린의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하는 또 다른 이산을 만들었다.

광복 72주년을 맞은 오늘 날까지도 돌아오고 싶어도 못 오는 사할린 동포들이 있다는 것은 한국이 없다는 말과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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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주하 작가


한국인이라면 ‘못난 조선’을 기억한다.

나라 잃은 국민으로의 가슴 아픈 일과 통곡과 눈물로 살아야 했던 선인들에게 미안함을 고백하고 살아 온 역사적 노고를 기렸으면 한다.


아픈 역사 체험을 통해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체성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사할린 동포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극복 했으면 한다.

사할린 한인 역사에 관한 범국민적 관심과 참여도 필요하다.

언어와 습관을 대신하여 우리의 미래 문화콘텐츠를 우리의 역사와 결부시킨 대통합의 역사를 써야 한다.

한글을 잊어가는 4~5세대의 청소년들에게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과 한국말을 가르치는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그 일을 누가 담당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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