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진진 Sep 10. 2024

비밀의 숲

<비밀의 숲> 수많은 비밀을 가진 존재들이 모여 숲을 이룬다


하지만 난 이대로 누군가를 쉽게 좋아하며 살고 싶다



이 그림은 재작년 미술반 전시 때 출품한 2개의 작품 중 하나이다. 원래 하나만 내려다 하나론 모자란 것 같아 전시 몇 주 전부터 하루에 몇 시간씩 짬을 내 그렸다. 그림의 배경은 예전에 놀러 간 제주도 동부의 ‘비밀의 숲’이란 곳이다. 끝이 없이 늘어선 편백나무가 이름 그대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다. 하늘을 다 가릴 듯 높게 솟은 편백나무 사이로 들어가면 마치 나무의 품으로 뛰어드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곳에서 찍은 사진을 옆에 걸어놓고, 아무도 없는 어두컴컴한 동아리방에서 한편으론 긴박하게, 한편으론 여유롭게 그림을 그렸다. (여담이지만 우리 학교 동아리방은 예전에 병원 영안실로 쓰였단 소문이 있다. 뭘 그리든 그림에 음산한 기운이 깃들 것만 같다.)


세월에 의해 변색되고, 또 빛을 받아 시시각각 변하는 나무의 결을 표현하기 위해선 인내심을 가지고 여러 번의 붓질을 해야만 했다. 처음에 칠한 색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 위에 다른 색을 덧칠하고, 또 빛을 받은 부분을 표현하기 위해 밝은 색을 올리고… 마치 난을 치듯이 나무를 그렸다.


그림을 완성할 때쯤엔 새로 올린 색들에 가려져 처음 칠한 색은 보이지 않았다. 이 나무가 원래 어떤 색이었는지, 그림을 그린 나 말곤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 순간 그림 속 무수하게 늘어선 나무들이 각자 자기만의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마치 나, 그리고 우리 모두처럼 말이다. 우린 각자 비밀을 가지고 있지만 모든 걸 말하진 않는다. 말하고 싶은 건 말하고, 숨기고 싶은 건 적당히 숨기면서 다들 살아간다.


난 쉽게 누군가를 좋아하고 동경한다. 누군가의 빛나는 면, 닮고 싶은 면을 보고 쉽게 반한다. 그럴 때마다 그 사람을 더 잘 안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주변인들이 잊지 않고 한 마디씩 던진다. “걔 그런 사람 아닌데.” “걔가 ~~ 했다는 소문, 못 들어봤어?” 내가 몰랐던 그 사람의 뒷면, 어두운 면을 굳이 들춰내는 것이다. 주변인들의 말은 헛소문이나 본인의 편견에 의해 왜곡된 말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한 치 거짓 없는 진실일 수도 있다. 그들 눈엔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바보처럼 보일 것이다.


서로 등쳐먹고 배신하는 요즘 같은 흉흉한 시대에 나 같이 단순한 사람이 바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이대로 누군가를 쉽게 좋아하며 살고 싶다. 누군가의 드러내기 싫은 깊숙한 비밀, 나무껍질을 죄다 벗겨내고 남은 부끄러운 알몸을 굳이 드러내어 알고 싶진 않다. 그걸 숨기기 위해 각자의 옷을 입고 있는 게 아닌가.


비밀의 숲의 나무들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 우린 굳이 가까이 다가가 나무를 만져보거나 가지를 부러뜨리거나 하지 않는다. 각자의 껍질을 입고 과묵하고 곧게 하늘을 향해 있는 나무들을, 나는 앞으로도 의심하지 않고 살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