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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 Mar 15. 2020

잡초야, 고마워!

사회 구성원으로 역할을 인정받고 구체적인 성과도 확인하며 살고 싶었다. 하루를 꽉 짜인 일정으로 바쁘게 보내고 통장에 월급이라는 것을 다시 받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쉬다 보니 돈벌이의 고단함조 기억 저편으로 넘겨버렸나 보다. 돈 버는 것이 어디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던가. 영과 육을 온전히 갈아 넣어야 하고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다는 걸 면접 가서야 기억이 났다. 그만둘 수 있는 기회는 몇 번 더 있었다. 집에서 통근하기에는 멀어서 제공되는 원룸은 쓸쓸하기 짝이 없고 쾌적함과는 거리가 먼 교무실의 풍경도 여전했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으로 옆밭 주인인 교감선생님이 소개해 준 기간제 근무를 받아들는데 막상 학교에 가보니 예전의 힘들었던 기억들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온종일 사람들과 부대끼며 하루를 견디기엔 나의 정신력과 체력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싫었다. 의욕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인데 마음만 앞섰다. 서류를 제출하고 계약까지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 갈등은 시작되었지만 한번 약속한 것을 뒤집을 수는 없어서 이틀을 더 고민하다가 결국 내려놓고야 말았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신체검사 결과 서류를 제출하러 갔을 때였는데 검사하는 김에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대장내시경까지 했더니 수면유도제로 몽롱해진 머리로는 도무지 업무포털의 비호가 생각나지 않았다. 얼마 전에 설정했지만 늘 쓰던 조합으로 열 번 넘게 입력해도 열리지 않을 때 나는 그만 좌절했다. 내부 결재로 재발급을 받으면 되는 문제였지만 금식 후에 속을 몽땅 비우고 나니 기운은 어찌 그리 없던지 이런 상태로 업무를 감당할 수 있을까 절망적인 회의가 들었다. 그런데도 여러 가지로 편리를 봐주려는 관리자의 배려가 고마워서 또 말을 못 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생각을 거듭해봐도 밤마다 황량한 원룸에서 눈물로 베개를 적실 것 같았다. 게다가 자꾸만 미루어지는 개학을 기다리며 노심초사할 생각에 스트레스는 묵직하게 뒷목을 누르기 시작하고 내 얼굴에서 웃음 사라지게 되었다.   


겨울 동안 집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기가 참으로 지루했다. 도서관은 폐쇄되어 책을 빌려다 읽을 수 없고 이웃과 커피 타임도 할 수 없어서 미세먼지 없는 날 산책로와 공원을 걷는 것이 유일한 외출이 되고 보니 간절하게 출근이라는 것이 하고 싶었다. 그래서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결정을 하게 되었지만 밤에 하는 결단은 특히 믿을 것이 못 된다. 아침이었으면 아마도 냉정한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책임한 번복을 하고 나니 한없이 부끄러워 마음이 마냥 가볍지는 않지만...


날마다 쓸고 닦아서 이제는 싫증 난 집안일이 얼마나 하고 싶고 심드렁하게 드러누워 빈둥거리던 일상이 얼마나 그립던지! 주말이면 시골에 가서 지긋지긋하다던 잡초를 열심히 뽑을 생각에 얼마나 감사하던지! 


그동안 익숙할 대로 익숙해서 시시하게만 생각되던 소중한 나의 일상을 세상 다시 없이 고마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여러 번 밝혔듯이 암을 겪고 나서 결심한 것 중 한 가지가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느라 내 마음을 거스리는 일을 다시는 하지 말자고 굳게 마음먹었는데 이번 기회로 그 결심을 다시 추스를 수 있었다. 나는 이제 돈을 벌 수 있는 경쟁력은 이미 상실한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아무리 오래 직장 생활을 했다지만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지금의 자리에서 충실히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튤립
수선화
상사화
월동 시금치


그런데 내 소식을 들은 두 곳의 반응이 확연하게 달랐다. 시누이나 시골의 이웃 언니는 기왕에 하던 일이니 잘해보라고 응원한 반면, 비슷한 시기에 퇴직한 선배 동료 두 명은 펄쩍 뛰면서 어쩌려고 그 스트레스를 감당할 거냐며 큰일 났다고까지 하면서 걱정해주어 결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남편은 나의 얼굴빛이 달라졌다면서 그토록 힘들어하는 줄 몰랐다고 한다. 나야말로 과욕과 허세는 주변에 민폐를 끼칠 뿐 아니라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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