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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K Oct 01. 2022

유학생활 회고록: 낭만과 열망 사이

대학 졸업 후 대학원 생활의 시작과 끝에 대한 이야기

몇 년 전, 미국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백악관으로 아이들을 초대하여 '시간의 소중함'에 대하여 제언을 남겼던 영상이 생각난다. 당시 오바마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본인이 죽기 전에 떠올릴 것들에 대해 언급을 한다.


여러분들은 내가 Deathbed에서 과연 무엇을 떠올릴 것 같나요?


살면서 Deathbed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은 적어도 살면서 한 번은 있을 것이다. Deathbed는 사람이 죽기 몇 시간 직전에 사람이 누워 있는 침대 또는 장소라고 할 수 있으며, 인생에서 쌓아온 추억의 조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그 찰나의 순간들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죽기 직전은 몸과 마음이 정신이 없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도파민이 가장 높게 분비되는 시간이다. 여유가 된다면 여러 기억들을 소환할 수 있겠고, 여유가 없다면 잠깐이라도 떠올릴 수 있는 사치가 있을 것이다.


오바마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의 Deathbed에서 떠올릴 순간들은 다사다난했던 정치, 대통령 재직 시절이 아니라 자식들과 정원에서 뛰놀았던 순간들일 것이다.
"우리는 과연 오바마처럼 의식적으로 순간들에 정말 집중하며 살 수 있을까"

내가 Deathbed로 나의 유학 생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뉴욕에서 대학원 생활이 반드시 나의 Deathbed에서 회고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손에 꼽을 만한 순간의 의미는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력한 경험이며, 이는 어느 누구에게도 그 본연의 의미가 전달되지 않고 본인의 가슴 안에 강력하게 각인되어 있다. 특정 장소에서의 추억, 특정 사람들과의 기억, 당시 나의 특정한 모습 등 우리의 인생 여정 안에서 진심을 가지고 임했던 순간들은 오로지 본인만이 그 가치를 알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누군가에게 그 가치를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도 어쩌면 필요가 없을 것이다. 본인이 경험한 모든 데이터는 뇌라는 도서관 안에 보존되며 이를 통해 삶의 원동력을 가지고 밋밋한 일상에 활기를 주기적으로 넣어준다면 이미 충분하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살면서 임팩트 넘치는 순간들이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손꼽을 것이며 대부분 그게 좋은 날이라고도 한다. 입학식, 졸업식, 여행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추억, 학창 시절, 연애 등 화려하고 매우 짧은 순간들이다. 하지만 나의 뉴욕 생활을 회고해보면 이와 상반된 데이터들이 내 도서관 안에 보존되어 있다. 내가 손꼽는 그 찰나의 순간들은 삼성증권 썸머 인턴십에서 최종 오퍼 이메일을 받았던 순간도 아니고, 졸업식 때 116가 전체에 울려 퍼지던 Jay-Z와 Alicia Keys의 'Empire State of Mind"를 들었을 때도 아니고, 약 2년간의 소중한 기억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미소를 머금던 순간들도 아니었다.


인생 통틀어 가장 찬란했던 순간들, 가장 분투하던 절박한 시간들, 오히려 부족하고 아무것도 몰랐기에 내겐 더 가치가 있었던 시간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보고자 한다. 당시 선택들이 좋게 풀렸던 안 풀렸던지 간에 그래도 뭔가 스스로도 별 볼 일 없었다고 생각했던 인생에서 뭐라도 짚어보려고 했던 시간들이다.




Chapter 1. 대학교 학창 시절

"일리노이 주립대학교의 캠퍼스 생활: 2005년~2010년"


어느 맑은 날이었던 2010년 12월 20일 나는 일리노이 주립대학교(Univ.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을 졸업했다. 시골의 작은 학교이며 시카고에서 약 2시간 반 정도 걸리는 공학과 회계 쪽으로 유명한 학교이다. 한국 사람들이 매우 많은 편이어서 대학 생활을 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정도로 한인 커뮤니티 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나는 대학교 1학년 직후, 용산 카투사 군 복무를 2년 마치고 돌아와 2년 반 뒤인 2010년 겨울, 정치학 전공으로 졸업하게 된다. 왜 정치학과를 택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시 기억을 되돌려보면 JD(Juris Doctor) 학위 획득을 목표로 변호사가 되기 위해 정치학과를 택했던 것 같다. 입학 당시에는 생화학과(Biochemistry)로 입학하였나 내 적성에 너무 맞지 않았는지 1학년 GPA가 2.52였다. 거의 다 C였다고 보면 된다.


나는 코넬대학교 대학원에 꼭 진학하고자 하는 마음을 대학교 3학년 때부터 가졌었다. HR 석사 과정으로 MILR(Master of Industrial and Labor Relations) 프로그램에 관심이 있었고 입학하여 2년간 체계적으로 배워보고 싶었었다. 대학교 4학년 때부터는 조직에 관련 수업들을 들으며 나는 반드시 코넬에 입학하겠다는 마음으로 2년 가까이 목표하며 살았었다. 대학교 3학년 당시, 가을 방학을 활용해 코넬 대학교 이타카 캠퍼스에 찾아가 입학 담당자를 만나 그녀의 사무실에서 나를 소개하고 설득해 보았다.


내가 GRE 점수는 높지는 않지만 시카고 상원의원 인턴 등 다양한 인턴 경험이 있으니 내가 이번 겨울에 지원을 하게 되면 나를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 다만, 암기는 정말 자신이 있다. SAT를 준비하던 고등학교 시절에, 그 바쁘던 시절에도 교회에서 열린 영어 성경 암송대회에 나가 로마서 8장을 단 한 토씨도 안 틀리고 나가 상을 받았을 정도다. 다만, 세상이 암기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GPA는 낮은 편이었고 나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다양한 인턴십 경험과 설득력이 있을 법한 에세이들로 나를 보완해보려 했었다. 돌파구가 딱히 없었다.


다들 유학 생활을 하면 알겠지만 여름에 한국 나가는 것은 모두가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으로 Final 시험을 과연 언제 마치고 서둘러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가가 초미의 관심사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겠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나 또한 1년간 일리노이 시골에 박혀있으면서 그간 너무 한국에 가고 싶었고, 한국으로 돌아가 술도 잘 못 마시는 내가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지며 행복을 만끽하고 싶었다.


나는 결국 여름에 한국행을 포기하고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Heather Steans 인턴십 면접을 보고 합격을 한 후 여름 동안 시카고에 잔류하게 된다. 동양인이 나 혼자였으며 나름 미래를 그려볼 수 있다는 희망에 24살 여름은 그렇게 바삐 흘러갔었다.


"2009년 6월, 일리노이 상원의원 인턴쉽 시절"


"어느 주말에 나와서 시카고를 배경으로 담아보았다"




역시나였다. 그녀는 나의 높지 않았던 GRE 점수를 우려했고, 나는 그 우려를 반드시 다른 영역으로 잠재우겠다는 불타는 의지로 다시 일리노이 캠퍼스로 복귀했다. 오히려 더 좋았다. 그녀의 의심은 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오히려 나는 강력하게 더 밀어붙이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삶의 모든 방면에서는 아니지만, 나는 목표를 설정하면 시각적으로 그 목표를 내 머릿속에 넣어야 하고, 모든 마인드셋을 그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다만 내가 내 스스로 설득되는 목표를 설정하기 전까지 매우 오래 걸리는 편이다.


당시 재현이라는 친구와 룸메이트 생활을 하였는데, 그 친구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보게 된다. 나는 일리노이로 돌아오자마자 칼을 갈기 시작했고, A4용지 한 장 한 장에 "코, 넬, 가 자"를 출력하여 벽에 붙이고 모든 에너지를 쏟게 된다. 나의 모든 노력이 하늘까지 닿도록 최선을 다했고, 하늘에서도 '야 얘는 그래도 코넬 붙여줘야 되지 않겠냐..' 소리가 들려야 할 정도로 앞밖에 보지 않았다.

"실제로 코넬을 갈 수 있을까 의심 가득했던 나날들"


나는 몇 주 후에 코넬대학교 대학원으로부터 불합격 이메일을 받게 된다. 그놈의 GRE 점수가 나의 뒷다리를 잡게 되었는데 생각해보면 그들의 판단 기준이 GRE 점수 말고 뭐가 있겠는가 싶기도 하다. 수학은 800점 만점에 790을 받았지만, 영어 점수가 낮았다. 그리고 컬럼비아 대학교 Teachers College 내 조직심리학(Organizational Psychology)과로 진학하였다. 이타카였냐 맨해튼이었냐의 문제는 결국 맨해튼으로 결정되었으며 나는 2011년 1월 중순 학기 시작을 준비하기 위해 졸업식 직후 가족들과 LA와 라스베가스에서 여행을 마치고 눈이 펑펑 쏟아지는 2010년 12월 뉴욕에 도착하게 된다. 당시 25살이었다.


Chapter 2. 뉴욕 맨해튼 생활

"일리노이 시골에서 뉴욕 맨해튼으로 전환은 내게 너무나 낯설었다"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한쪽 문이 열린다고 했던가. 나는 이타카(Ithaca)행 실패에 대한 자괴감을 금방 기억 속에 지워버리고 뉴욕이라는 도시에 빠르게 매료되기 시작했다. 타임 스퀘어에 처음 들어설 때 그 웅장함과 가슴 벅참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옥수수밭에서 하이라이즈 빌딩으로 바뀌었으니 그 감동은 어마어마했다. 당시 25살이었던 나는 이게 바로 내 미래라고 생각했었고 잠시나마 그 사치에 젖어보았다. 난 도시에 어울렸던 사람이라고 되뇌었고, 시골에서 운동만 했던 내 모습은 다 훌훌 털어버렸다.


나는 당시 카메라를 들고 뉴욕을 모두 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평일과 주말 상관없이 맨해튼, 브루클린, 심지어 퀸즈의 모든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캠퍼스 내 Butler Library 주변을 거닐며 맑은 날씨와 여유로운 사람들의 모습들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Queens에서도 살아보았고, East Village에서도 살아보았고, Harlem에서도 살아보았고, New Jersey에서도 살아보았다. 총 네 곳에서 살면서 다른 분위기에 심취하여 시간을 보냈다.


"시선이 머무는 모든 곳이 여행지였던 뉴욕 맨해튼"


"끝도 없이 삼각대를 들고 거리를 누비며 뉴욕 곳곳을 담아내기 바빴다"


"내가 제일 좋아하던 어느 한 루프탑"


나의 주말 사진여행과는 별개로 평일 대학원 수업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어려운 과목도 몇 개 있었지만 대부분 너무 즐겁게 수업을 들었다. 대학원은 총 2년 과정이지만, 1년 반 만에 모든 수업을 다 듣고 졸업 시험을 치겠다는 심정으로 각 학기마다 최대치의 수업을 들었다. 대학교 생활도 3년 반 정도였고, 대학원도 1년 반, 즉 반 년치를 앞당겼다. 그 이유는 전혀 모르겠다. 왜 그렇게 서둘러 무엇을 해보려, 무엇을 증명해보려 했는지 난 아직도 사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난 이렇게 서두르는 성격이 훗날 나의 미래에 이상하게 작용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나는 의도치 않게 11년간 직장생활 중 이직을 굉장히 많이 했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목표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려는 마인드셋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무엇인가 목표를 정해놓고 그걸 이루어 내보려는 것 자체가 나의 유학 생활 시절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목표란 것은 흔히 개인의 목표로 귀결되기 때문에 무조건 나 혼자 남게 된다. 목표가 같더라도 개인이 투입하는 노력이 다르기 때문에 결국 각 개개인의 싸움으로 연결된다. 나는 이 외로운 싸움이 전혀 외롭게 느껴지지 않았고 먼 훗날에 선물 보따리를 풀 사람은 결국 나라는 것을 인지하려 했다.


누가 보면 대단한 성취라도 한 사람인 것처럼 들리겠지만 그렇게 들렸다면 절대 아니니 오해 안 했으면 한다. 난 내가 가진 능력과 머리에 비해 세상에서 받은 것이 많다고 항상 생각해 왔다. 내 고등학교 시절이 담긴 이전 글들을 보면 철저하게 학창 시절이 부재했고 누가 봐도 아사리판이었다. 마음이 여려서인지 그 당시 흘렸던 눈물들이 총 살면서 흘렸던 눈물 양의 총 8할 이상을 차지했었을 것 같다. 다만 이렇게 생각하고 싶다.


나는 이 순간들이 당장은 아니지만 내가 살면서 Deathbed에 이르기 전까지 결국 연결된 점(Connecting Dots)들로 인해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로 언젠가 선을 이룰 것이라 믿는다.


물론 대학원 때는 여유가 많이 생겨 고등학교 시절을 보상하는 여유를 많이 즐기게 되었다. 맨해튼이란 장소는 익히 알겠지만 160만 인구가 160만 개 다른 인생 스토리를 가지고 서로 연결된 점처럼 살아가는 곳이다. 즉, 모두가 각자 고유의 스토리를 가지고 서로 교류하고 영향을 준다. 한인 커뮤니티가 여기는 잘 돼있어서 나는 많은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들과의 시간들을 모처럼 누리면서 좋은 여정들을 많이 내 '뇌 도서관'에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2011~2012년 한인학생회 활동 시절"
"뉴욕에서의 생활은 참 빨리 흘러가게 되었다"


Chapter 3. 마무리와 한국행

좋은 시절은 결코 길지 않다. 호시절은 운이 정말 좋으면 몇 개월이고 더 충격적인 것은 지나고 나서야 그게 호시절인지 알게 된다. 나는 1986년생이다. 나와 같은 세대라면 2000년 초반부터 2000년 중반 전후가 얼마나 낭만 깊은 세대인지 알 것이다. 브라운아이즈, SG워너비, 다비치, 버즈, 플라이투더스카이, 바이브 등 명곡 발라드가 쏟아져 나오던 시대였고 노래방과 술집에서 그리 신날 수가 없었던 날들이었다. 하지만 그때에는 우리는 그게 좋은 시절인지 모르고, 현재 코로나까지 덮치고 마스크까지 쓰는 날들이 와서야 그날이 좋은 날들이었노라고 무지하게 회고한다. 나의 뉴욕 생활 호시절도 그렇게 쏜살같이 지나고 나서야 나의 '뇌 도서관' 사서가 내게 조용히 알려주었다.


그렇게 나의 뉴욕 생활은 2012년 6월 마무리하게 된다. 야외 캠퍼스에서 졸업식을 마치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8월 초 입사이기 때문에 나는 무조건 한국에 가야 하는 상황이고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2012년 5월 16일, Commencement의 끝으로 뉴욕 생활은 마무리된다"


나에게 있어서 유학 생활로부터 배운 인사이트는 다음과 같다:


1. 나란 작은 사람이 뉴욕이란 거대한 도시에서 뛰어난 사람들과 교류하며 비벼볼 수 있었던 점

2. 그 시절이 소중했다고 지금이라도 깨달아 삶의 원동력을 끊임없이 제공하고 있는 점

3. 유학 스토리보다 더 뛰어나고 엎치락 뒤치락 여정을 다시 한번 만들고 싶다는 욕구를 자극하게 된 점


우리의 호시절은 사실상 지금 당장 못 느낀다. 그걸 느낀다는 것은 굉장한 천운이며 감사한 일이다. 나 또한 호시절이 언제 왔다 갔는지도 잘 모를 정도다. 내가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에게 기원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모두 각자의 경험의 깊이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추억 부자'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가 가져갈 것은 바로 이것이며, 훗날 Deathbed에서 우리가 지을 옅은 미소가 모든 기억들을 대변해주길 소망한다.

"Sealed: 2010~2012, New York"


아름다운 것은 소멸하는 순간에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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