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첫인상은 철옹성의 철벽과도 같았다.
그녀의 첫인상은 철옹성의 철벽과도 같았다.
다가가기 힘든 기품을 품고 있는, 마치 잔다르크의 폭풍 아우라와 같은 그것. S는 잔다의 피를 이어받은 산다르크였다. 말 한마디 건넬 때마다 돌아오는 차가운 기운. 마치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얼음장 같은 분위기에 뭔가 실수를 하지는 않았는지, 아직 분위기에 적응을 하지 못한 건지 혼자서 눈치를 보게 되었다. 어쩌면 내가 너무 긴장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으니.
우리는 K라는 모임의 사이드 프로젝트에서 만났다.
S는 글씨체를 교정해 주는 사이드 프로젝트의 진행자였다. 평소 나의 필체는 정오품의 고급스러운 서체와는 사뭇 거리가 먼, 악필 중에서도 최고급 수준의 1등급을 달렸기에 도저히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글씨만으로 사람을 구분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나의 계급은 필사 “노비”였을 것이다.
프로젝트에 참여 가능한 날짜는 [목요일/금요일/토요일].
이번 생의 신분을 바꾸러 가기 좋은 날을 고민하다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반백 수의 장점을 적극 살려서 사람이 제일 적을 것 같은 “목요일”을 선택했다. 나의 전략이 맞아떨어졌는지 평일의 모임에는 4명만이 참여했을 뿐이다.
소수 정예로 시작된 글씨체 교정ㅡ인생 계급 상승ㅡ프로젝트는 화목한 분위기로 시작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S가 잔다르크의 후손 산다르크인줄은 꿈에도 몰랐다. 모임의 특성상 나이, 직업과 관련된 사항들은 모두 비공개였다. 서로를 편견 없이 바라보기 위한 하나의 제약. 이번 프로젝트에서 S는 나에게 “글씨 교정 수업 선생님”일뿐이었다.
- 선생님! 이렇게 쓰는 거 맞나요?
- 하하하하. 선생님 대신에 “S님”이라고 불러주세요.
사이드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은 K모임에 참여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그래서 서로 간의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S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니면, 저기요?]
마음속으로 고민하다가 “선생님”이라고 외쳤지만,
그녀는 신속하고 단호한 어투로 "S님“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나중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글씨체 교정과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사람은 모두 운영진이 아닌, 모임의 참여자라고 했다. 모임 멤버들 중에서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싶은 사람 누구나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었다. “OO님”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 모두는 평등했다.
모임이 끝날 무렵 S에게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물어보려고 했다.
- S님 인스타그램 하시나 봐요?
- 네, 뭐...
그 당시의 나는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함께할 팀을 구하고 있었다. 마침 S도 인스타그램을 통해 꾸준히 글을 쓰면서 활동하고 있다고 하여 함께하자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견고한 벽 같은 반응에 더 이상 물어볼 수 없었다. 산다르크와 함께할 기회는 그렇게 날아가버렸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우리는 서로를 “철벽”으로 보고 있었다.
나는 나대로, S는 S대로 서로를 바라본 것이다. 산다르크가 바라본 “나“라는 존재는 말 수가 별로 없고, 이야기를 해도 대꾸를 잘 안 했다고 한다. 그녀를 바라보는 철옹성과 같은 나의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모임에 처음 참여한 긴장감 때문이었을까. 그 당시의 나만이 알고 있는 작은 비밀로 남겨두겠다.
모임이 끝나고 너무나도 아쉬웠던 나머지.
고심의 고민을 거듭한 끝에 용기를 내어
밤 12시, 장문의 카톡을 보내게 된다.
- 안녕하세요 S님! 오늘 수업 너무 잘 들었어요.
- 한 가지 여쭤볼 게 있는데요, 혹시 브런치 작가 관련 팀이나 스터디에 따로 참여하는 곳이 있으신가요? 저는 진짜 게으른 편이라 카페나 이런데 가서 글을 쓸 수밖에 없는 환경설정을 해야 그나마 글을 쓰는 편이라서요! …이번에 브런치 출판 프로젝트 응모를 목적으로 한 스터디를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결론은 같이 브런치 작가 관련 모임을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밤이 늦어서 길게 남겨요. 좋은 밤 되세요!
[지금 생각하면 참 길게도 썼다.]
그도 그럴 것이, 글씨체의 끝판왕 산다르크는 심지어 출판사와 계약이 된 작가라고 했다. 그때의 나는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초보 운전자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다. 용기를 내어 같이 팀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했다. 밤 12시가 지난 시간이었지만, 의외로 S는 문자에 바로 답장해 줬다.
-우와 너무 좋은 생각인데요.
-저는 너무 좋아요!! 팀 만드시면 저도 꼭 껴주세요. :)
칼답을 해준 그녀는 이미 나에게 철벽녀 산다르크가 아닌, 그저 친절한 S일 뿐이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내 정기 모임 날짜와 S의 글씨체 수업 날짜가 겹쳐서 바로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했다.
-내일 모임 오시죠?
-그럼 내일 잠깐 얘기해볼까요?
-네 좋습니다! 혹시 몇 시쯤 도착하시나요?
-저도 일찍 가볼게요!
그렇게 약속을 잡은 뒤 “알파카를 닮았다는 이야기”, “남미 여행에서 알파카 고기를 정말 맛나게 먹었는데 너무 그립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내일을 기약하기로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카톡을 보낼까, 말까”
하던 그 순간에서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현재의 우리가 이렇게 미래를 꿈꿀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영원히 철벽녀 산다르크로 남았을지도 모를 그녀.]
이제는 안다.
친절한 S는 토마토를 싫어하고,
토이스토리 버즈를 좋아하는 동심을 가지고 있으며,
흑인 재즈가수 냇 킹 콜의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을,
내 사람들에게는 세상 최고로 귀엽다는 것을.
용기를 내어 S에게 메시지를 보낸 건
반박할 수 없는 내 생애 최고의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