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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on A Jun 04. 2024

<혈의 누>(2005, 이대승)

사람들의 얼굴에 담긴 또 다른 얼굴

        근대가 태동하던 혼란의 시기에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위정자들이 행하던 반인륜적인 사형과 그것을 똑같이 구사하는 원혼의 복수, 그 속에 있는 가장 낮은 자리에 발붙인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삶이 평안할 수 있는 방향으로만 시선을 돌린다. 급변하는 혼란한 사회, 그 속에서 인간의 마음은 본능만 남은 짐승의 그것과 다름없다.


변화되는 사회, 고립된 섬

 영화는 제지업이 크게 번성한 동화도라는 섬에서 시작된다. 바다 한 가운데 홀로 서 있는 외딴섬, 그 곳에서 공물로 바쳐질 종이를 실은 배에 화재가 발생하고 뭍으로부터 파견된 군관인 이원규가 사건의 조사를 위해 일행과 함께 도착한다. 그가 섬에 내리자마자 섬의 나루터는 허가 없이 나갈 수 없는 감옥이 되어버리고 화재와 함께 잔인한 사형방법으로 살해된 시신이 발견된다. 그 이후 하루에 한 사람씩 대역죄인을 벌하던 5가지 잔인한 사형의 방법으로 죽어가고 사건은 점점 미궁 속에 빠지지만, 7년전 신유박해(1801) 때 천주교 박해로 사형당한 황사영에게 자금을 전달했다는 이유로 천주쟁이로 몰려 일가가 몰살당한 제지소의 전 주인인 강객주의 죽음에 직면하면서부터 섬에서 벌어진 인면수심의 일들이 수면으로 떠오른다. 

 조선 말기, 근대로 접어들며 중인의 신분이던 상인들은 부를 축척하고 마을의 실 세력가가 되었다. 그들은 신분만 낮을 뿐, 인품과 학식을 갖춘 사람들이 많았으며 사대부가 못지 않게 존경을 받기도 했고, 그 부를 이용해 사대부와 결탁하여 기득권을 가지려 한 자들도 있었다. 사건의 수면 아래 도사리고 있는 강객주이라는 인물은 전자와 후자를 모두 대표하던 조선 말기의 거상이었다. 하지만 부와 함께 커버린 그러한 인물들은 신분과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조선의 사대부에 대한 강력한 도전 세력으로 그들을 견제해야 하는 사대부의 위기의식이 사건이 품은 원죄이다. 섬의 가장 높은 신분인 김치성은 강객주의 권세가 날로 커가는 것에 불안을 느꼈을 것이고, 그의 제지소가 축적해주는 막대한 부를 탐욕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며, 노론에 의해 밀려난 정치권으로의 복귀를 열망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탐욕에 눈먼 사람들과 함께 강객주를 모함하고 본보기 삼아 모든 섬의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를 거열 한다. 공을 위해 부정하게 죄를 언도하는 토포사와 제물에 눈 먼 발고자들,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사대부의 암묵적 동의 하에 강객주는 처참히 도륙 당한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이익의 직접적인 수혜자들 뿐만이 아니라 가장 순수하다고 믿어지는 민심이 이 죽음을 묵과해 버린다는 사실이다. 섬의 민초들은 삶의 터전을 마련할 때 강객주로 부터 진 빚을 그가 죽음으로서 면죄 받을 수 있다 여기고 강객주를 파멸로 이끄는 것에 동의한다. 고립된 섬에서 그들의 질서가 무너졌을 때 집단적으로 나타나는 그들의 무의식적인 이기심이 희생양을 만들어 내고 파렴치한 그들의 터전을 지키는 것에 모든 것을 눈감아 버린 것이다. 


단죄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군관으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섬으로 들어온 이원규와 7년 전 강객주의 죽음에 대한 단죄를 직접 거행하는 김인권은 서로 반대되는 위치에 서서 대립하지만 그들은 그들을 둘러싼 모든 제도와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고립되어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강객주의 죽음에 얽힌 사건들의 해결도 원혼을 달래기 위한 복수도 제대로 이루내지 못한다.  

 심허로라는 병이 있는 김인권은 한번도 섬을 떠나보지 못한 인물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그가 앓고 있는 심허로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모든 것은 그 섬에 존재한다. 이상적 고립, 동화도란 섬의 정체는 국가라는 제동에서 비켜서 있는 고립된 공동체이다. 그는 거기서 반상의 법칙에 준하지 않는 강객주에 의해 새로운 세상을 알아간다. 능력에 맞게 사람을 대우하고 섬의 모든 사람들에게 저리의 융자를 통해 그들의 생활을 돕는 아마도 인권이 책에서 꿈꾸던 이상향 그 자체일 것이다. 하지만 강객주는 ‘부’ 라는 것 이외에 넘보지 말아야 할 권력을 키워가게 됨으로 해서 위험 인물이 된다. 아직은 자신들의 법을 유지해야만 하는 사대부들의 법도에 따라 그는 엄청난 희생양이 된다. 점차 질서가 어지러워 지는 세상에서 그 섬은 고립에 의해 또 다른 집단적 봉건제도를 유지한다. 그리고 그 질서는 서로의 집단 이기주의에 의해 유지되고, 인권은 강객주의 죽음을 막지 못한다. 그는 아버지 김치성의 권력 아래에서 수동적이며 그 권력의 연장선에 존재한다. 다만 그는 연인인 강객주의 딸을 구하는 것으로 그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여기지만 그 연인마저 희생되자 욕정에 가득 찬 살인마로 변한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을지는 모르나 그 새로운 세상을 위한 희생을 거부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가 행하지 않았던 희생을 원혼의 복수라는 미명하에 욕망의 재물이 된 사람들에게 미룬다. 그는 연인과 함께 그 섬을 떠나지도 못했고 복수의 과업을 완성하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뭍에서 들어온 새로운 임물인 이원규는 어떠한가? 

 고립은 심허로를 앓고 있는 김인권에게만 국한된 환경은 아니다. 이성과 냉철함을 대표하고 새로운 문물의 중심에 서 있는 듯한 인물인 이원규도 실은 아버지의 질서에 갇혀 고립되어있다. 민심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 민심이 길을 잃으면 어떤 광기로 표출되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그가 중심으로 삼을 수 있는 천심이란 어떤 것인지, 그는 가치관의 잣대이던 아비의 악행 앞에서 혼란에 빠진다. 겉잡을 수 없이 변해 가는 시대, 반상의 법칙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점차 사라져 가는 그 시점에서 이원규의 거울이었던 그들이 취해야만 하는 것은 바로 ‘부와 권력’ 이었고 그렇기에 버리지 말아야 할 인간의 양심을 가차없이 버린다.  죽음의 아비규환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린 섬 동화도를 떠나오는 이원규는 국운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듯 결국 김인권의 단죄의 직접적인 증거인 직금도를 바다 한가운데 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 지도를 버림으로 해서 그는 스스로 아버지의 질서에 귀속되어 주저앉는다. 섬의 실력자인 김치성은 당파의 고립에 묶여 좌절된 정치 행보를 고립된 섬 동화도에서 임금께 충성한다는 면목으로 행하고, 매점하던 거상 강객주는 능력우선을 외치며 부로 인해 사람들의 민심을 잡으려 하나 기실 그의 속내의 차별도 사대부인 김치성과 다르지 않다. 

 침묵이라는 이름으로 동의하고 공적에 눈 먼 토포사가 주도한 강객주의 하드고어적인 거열을 지켜보는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는 또 다른 얼굴이 숨어있다. 저주의 말을 퍼붓고 사방에 피를 튀기며 사지가 찢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사람들, 그들의 얼굴에는 무서운 집단이기주의의 얼굴이 숨어있다. 아비의 악행과 그 아비의 가르침 사이의 괴리를 떠올리는 이원규의 얼굴은 그러한 이중적인 인간들의 얼굴 앞에서 좌절한다. 상처는 거대하게 부풀어올라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봇물이 되어 피를 쏟는다. 그 어떤 인물도 강객주의 죽음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자유롭지 못하다. 강객주를 발고한 호방을 비롯한 다섯 명의 사람들과 그것을 사주한 김치성, 그런 강객주를 살리지 못한 김인권과 출세에 눈멀어 강객주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토포사의 아들인 이원규, 침묵해버린 섬 사람들, 하지만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던 강객주 역시 그 원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사람은 능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설파하던 그도 자신의 여식 앞에서 염치를 저 버린다. 이렇듯 모든 인물들은 양심이라든가 염치에서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기에 그 이후를 평온하게 살아갈 인물은 없고 섬은 양심을 져버린 자들의 무덤이 되어 버린다. 


시대극이지만 현대적인


 반전에 굴하지 않는 스토리가 오히려 매력적이다. 이 영화는 범인이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그들이 그러한 일을 당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미스터리의 구조가 치밀해 보이지는 않으나 인물들의 원한 관계에 대한 전개는 건물을 쌓듯 층층이 견고하고 사건을 풀어나가는 한 층 한 층에서 성실함이 돋보인다. 너나없이 반전에 목을 매는 현 영화들 속에서 반전이 없어도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재미있는 점은 임권택 감독의 조감독을 한 탓인지는 몰라도 사건 사건을 이어가는 정황을 보여주는 작은 씬 들에서 화면 속 인물과 대화가 따로 인 듯한 느낌을 주는, <서편제>나 <춘향전>, <취화선> 등에서 볼 수 있었던 유사한 장면들이 곳곳에 존재한다. 그러나 주인공인 차승원의 대화나 영화의 후반부터 강렬함을 더하는 라프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의 테마는 시대극임에도 불구하고 염치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현대의 실상과도 동떨어지지 않는 세련된 감각을 보여준다.

  시대가 발전하고 시절이 변한다고 해도 마지막 밀고자였던 두호의 공개 처형은 어쩔 수 없이 진행 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가장 어두운 곳의 본능이다. 그렇기에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비통한 피 빛 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비참한 영화의 끝에는 해답이 없고 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 답답함은 이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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