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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결맘 Jun 14. 2024

혼자라도 괜찮다는 사람들에게

혹시 '에테르(aether)' 과학 용어를 아시나요? 그리스 시대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체의 움직임이 가능하게 하는 물질인 에테르를 가정했고, 이는 서구 근대 물리학이 태동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물리학자들에게 받아들여졌습니다. 17세기 근대 과학을 열어젖힌 뉴튼 역시 빛은 파동이며 우주를 꽉 채우고 있는 에테르라는 매질 덕분에 이 파동이 진행된다고 기술했죠. 에테르에 대한 과학자들의 믿음은 19세기까지 이어졌고, 1887년 앨버트 마이컬슨(Albert  Michelson)과 에드워드 몰리(Edward Morley)의 실험에 의해 에테르가 완전한 허구의 개념임이 밝혀졌습니다.


개별적 자아(A self)라는 신기루


과학은 종종 인간의 상상에 기반한 관념을 딛고 위태롭게 서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21세기 사회 과학과 서구 철학의 기본 단위인 인간의 개별적 자아(A self) 역시 에테르처럼 실제 존재하지 않는 관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개별적 자아가 존재한다는 사회적 믿음이 지금 현재 전세계를 덮친 정신 건강 펜데믹의 근본적 원인이라고 봅니다. 인간의 자아는 오랜 시간 동안 나와 상호 반응을 주고 받아온 사람과의 관계 사이에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실존합니다. 그런 관계가 사라지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던) 자아 역시 사라집니다. 다른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상호 반응을 주고 받아온 관계의 역사, 이것의 합이 바로 '나'입니다.


길쭉한 타원이 '우리' 를 뜻합니다. 중앙에 작은 원(자아/A self)이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여러 사람과 주고 받은 상호 반응 패턴의 합일 뿐이죠.



저는 이것을 '우리'라고 부릅니다. 'my mother'를 우리 말로 번역하면 '우리 엄마'가 됩니다. '내 엄마'라고 말하는 사람을 저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엄마'를 영어로 다시 직역해보면 'our mother'가 됩니다. 이럴 경우 화자와 청자 모두의 엄마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청자가 나의 형제 자매가 아닌 이상 '우리 엄마'는 문법적으로 틀린 말이 됩니다. 저는 '우리 **'이라는 2인칭 대명사가 바로 오랜 시간 동안 나와 상호 반응을 주고 받아온 관계를 나 자신으로 여기는 한국인의 직관이 투영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우리'라는 말이 개별적 자아(A self)를 대체해서 21세기 인간 정신의 기본 단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제가 이런 직관을 얻은 것은 10여 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박사 과정 학생이었던 남편을 따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몇 년 동안 지내게 됐죠. 미국에 간 직후부터 1년여 간 대학원 입학 시험을 준비하면서 방 구석에서 시험 공부에 열중했는데요. 서울에서 태어나 꽤나 다채롭고 역동적인 관계를 즐기던 저인데, 일순간 그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자 별안간 저 자신이 사라져버린 느낌이 들었습니다. 남편을 제외하고 아무도 저를 모르고, 저와 지속적으로 반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 관계가 사라지면 내가 사라지는 거구나!'


예전에 사회 교과서에서 도편 추방제에 대해 배우면서 '다른 곳에 가서 잘 살면 되지, 저게 왜 사형에 준하는 형벌이 되는 거지?'라고 생각했었는데요. 저는 도편 추방을 당한 사람처럼 필라델피아에서 '사회적 죽음'을 경험했던 것이죠.


저는 이 느낌, 아니 느낌이라고 하면 너무 가벼운 표현이고, 뼈에 새겨진 감각이라고 해야겠네요. 이 감각을 몸 안에 가득 채우고 대학원에 진학해 발달 심리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 곳에서 사회 과학, 아니 서구 지성사의 가장 기본적인 인간 단위인 개별적 자아(A self)를 맞닥뜨리게 되죠. 직관적으로 그것이 실체가 없는 환영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고, 저의 감각을 사회 과학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보고서를 쓰고, 영상 시를 만들고, 다큐멘터리도 찍으며 갖은 애를 썼습니다. 뭐, 결과는 당연히 실패였죠. 허허허.


'우리'는 '무아(無我)'와 달라요


동양 철학에 익숙한 분들은 '자아가 사라진다'는 말에서 무아(無我), 혹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緣起)'를 떠올리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관계에는 서로가 함께 쌓아 올린 시간의 역사가 필수적으로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갓 태어난 아이와 엄마는 '우리' 관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상호 반응의 역사가 이들 사이에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어떤 의미에서 신혼 부부, 새로 부임한 회사의 대표와 직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오랜 시간 동안 상호 반응을 주고 받으며 '우리' 관계를 지어가게 되고, 이 관계의 역사는 우리 뇌에 행동 패턴으로 새겨집니다.


발달적 관점에서 볼 떄 가장 원형적인 '우리' 관계는 역시 엄마죠. 갓 태어난 아이는 엄마와 함께 기초적인 '우리' 관계를 형성하고, 이는 아이가 다음 관계를 맺는 패턴의 기초 방정식으로 기능합니다. 아이는 엄마와 상호 반응 했던 패턴 대로 다른 사람과 우리 관계 맺고, 아이가 자라면서 행동 패턴은 더욱 다채롭게 꽃처럼 피어나며 독자적인 인격을 형성하게 됩니다.


고립은 인간의 정신을 파괴한다


'어른이 됐다면 개별적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정신은 다른 인간 존재와 상호 반응 없이 오랜 시간 격리된다면 제 기능을 잃고 철저히 파괴되어 버립니다. 1951년 캐나다 맥길 대학교 연구진은 자원한 학생들을 작은 독방에 가두고 모든 감각 자극을 차단했습니다. 일주일 이내에 학생들은 아주 간단한 연산도 할 수 없게 되었고, 극도의 불안과 극단적 감정 반응, 생생한 환각을 경험했습니다. 이 실험은 6주 동안 지속될 계획이었으나 학생들의 정신 건강이 악화되어 1주일 만에 중단되었죠.


저는 '우리' 관계가 사회적 정의나 도덕, 돈과 명예 등 수많은 가치에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 관계'에 맞지 않기 때문에 오랜 상호 반응의 역사를 공유해온 '우리' 관계를 너무나 쉽게 끊어버리는 건 득보다 실이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 관계를 나 자신으로 여기고 이것을 가장 우선적인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때 사람들은 전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주변에 오랜 시간 동안 상호 반응을 공유해온 사람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그들을 더욱 귀하게 아껴주세요.

그들이 곧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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