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결맘 Jun 11. 2024

에릭 로메르와 쫄면 순두부

에릭 로메르의 <녹색 광선>과 나의 20대


CGV에서 프랑스 누벨바그 대표 감독인 에릭 로메르 특별전이 열렸다. 덕분에 그의 대표작이자 베니스 황금사자상 수상작이기도 한 <녹색 광선>(1986)을 운 좋게 극장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80년대 프랑스 도심과 해변의 풍광, 사람들의 세련된 패션, 그리고 지적인 대사의 향연 덕분에 오랜만에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2시간 동안 차곡차곡 빌드업 해둔 상징이 폭발하는, 너무나 아름다운 마지막 신은 정말 평생 기억에 남을 듯싶다.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영화 <보이후드>의 마지막 장면이 이 영화를 오마주한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극장이 아니더라도 OTT에서 발견하시면 꼭 한 번 감상해 보시길 :)


에릭 로메르의 대표작 <녹색 광선> (1986)


영화는 파리에 사는 20대 여인 델핀의 여름휴가를 그려낸다. 멋진 시간을 기대했지만 델핀은 그 어느 곳에서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기만 한다. 그런 델핀의 불안한 모습에서 20여 년 전, 20대 시절의 나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나는 앞으로 무슨 직업을 가지게 될지, 어떤 배우자를 만날지, 건강한 아이를 만나 엄마가 될 수 있을지, 그 무엇 하나 결정된 게 없이 모든 것이 열려 있는 시간들. 숨겨져 있던 나의 운명선이 조금씩 드러나려면 훨씬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기억은 뇌가 아니라 쫄면 순두부에 저장!


숙대 앞 단골집 까치네의 대표 메뉴 '쫄면 순두부'


이런 기억들은 시간과 함께 모두 다 흘러가버린 것 같지만, 그 시절 내가 즐겨 들었던 음악이나 음식, 책을 집어 들면 그 때의 감각이 그대로 재현되곤 한다. 얼마 전 아들과 함께 나의 대학 시절 단골집 까치네에 '쫄면 순두부'를 먹으러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진한 조미료 맛의 순두부찌개는 그 시절 그 맛과 싱크로율 200%, 완벽하게 똑같았다. 그러자 그 시절 내가 가졌던 불안과 고민들이 다시 내 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게 아닌가!


내 눈앞에는 이제 막 10대에 접어든 아들이 치즈 알밥을 맛있게 먹고 있었는데, 그 시간의 낙차 때문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동안 '20대의 나'는 머릿속에서 적당히 아름다운 기억으로 보정됐었는데, 사실 그렇게까지 행복한 나날이 아니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살짝 눈물이 고였다. 아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구나, 나는 정말 많은 고개를 넘어왔구나, 다시금 실감했고 내가 대견했고 지금이 너무 감사했다. 지금 내가 마음에 품고 있는 문제들도 미래에 어느 순간 이렇게 되돌아볼 순간이 올 거라는 생각이 드니 그 무게가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다 괜찮아질 거야. 토닥토닥." 

모든 시간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2만7800원으로 유튜브 일단 시작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