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별하 Nov 09. 2024

단팥빵

기억은 안갯속으로 점점

오래된 기억이 사라졌다. 기억이란 것은 나의 마음속에서 혹은 머릿속에서 남기고 싶고, 추억하고 싶은 것들로만 저장하는 나만의 착각일까. 점점 기억의 혼란이 오고 나에게 좋은 기억만이 남아 있다.


치매를 진단받은 어르신은 어느 순간부터 기억하는 공간이 줄어들어서일까. 기억이 하나씩 하나씩 버려지는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오래된 일들은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이야기를 했다. 전쟁을 겪었던 일이라던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하셨던 말씀이라던가 등등. 세세한 것까지도 섬세하고 정교하게 묘사하며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70대를 훌쩍 넘어 후반으로 들어서는 나이에 이제는 밥을 하는 것도 잊어버렸고, 반찬을 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심지어 제시간에 밥을 챙겨서 먹어야 하는 것조차 잊어버려서 식사도 거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김장하는 것도, 삼시 세 끼가 있다는 것도. 어쩌면 배고픔의 느낌조차 잊어버린 걸까.


어느 날 찾아간 집 앞에서 만난 어르신은 위생비닐봉지에 스텐으로 된 밥공기를 넣어 놓치지 않으려는 듯 힘껏 움켜잡고 어디론가 걸어갔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공기 위로 수북하게 올라온 하얀 밥이 보였다. 쫓아올까 봐 뒤돌아서 자꾸 손을 휘이거리며 내저었다.


"저리 가! 오지 마! 따라오지 마!"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가라고 손짓하고는 짧은 단어를 내뱉었다. 뒤를 따라오는 내가 불편해서일까. 아니면 밥공기를 뺏길까 봐 염려스러워 그러는 걸까. 둘 다 일까. 감정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골목길을 돌고 돌아 도착한 곳은 동네 작은 식당. 스스럼없이 늘 그랬던 것처럼 문을 열고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슬며시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어르신은 식탁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밥공기가 들어있는 위생비닐봉지는 식탁 위에 올려놓은 채. 나에게 보여주었던 경계하는 눈빛도 아닌, 주변을 자꾸 둘러보지도 않고 얌전히 앉아서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으로.


이번에 갈 때는 빵집에 들러 빵을 한 봉지 샀다. 어르신은 항상 손을 보거나 차 안을 들여다보며 "먹을 거!"라고 똑같은 말을 했었다. 배가 많이 고픈 모양이라고 생각해서 빵을 사다 드리기로 했다. 다행히도 빵을 좋아하셨다. 지난번에 드린 누룽지는 손을 내저으며 "누룽지 싫어. 안 먹어!"라고 하셨다. 빵봉지를 보고는 빵을 꺼내 내 앞에 내밀며 "뜯어줘!"라고 얘기했다. 단팥빵 한 개를 다 드시고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누룽지 갖고 오지 마! 떡 갖고 오지 마!"

"빵은 좋아. 누룽지 싫어!"


누룽지를 끓이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 이가 시원찮은 어르신은 딱딱한 누룽지를 먹을 수가 없었고, 떡도 이에 달라붙고 앞니가 몇 개 없으니 잘라먹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어르신은 이제 누룽지를 물에 끓여서 먹어야 한다는 것도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스스로는 그것조차 모른 채로 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점점 기억이 사라진다. 안갯속처럼 뿌옇고 희미하게.



부표 위에 서 있는 새 생각에 잠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