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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공책

파란 그리움이 가득

by 정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문득 바라보니 몽실몽실 하얀 뭉게구름이 포근포근해 보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조금은 낮게 드리운 구름이 아기자기 귀엽기도 했다. 저기 저 구름은 강아지 같기도 하고, 여기 저 구름은 솜사탕 같기도 하고. 혼자서 구름 모양 맞추기를 하며 파란 하늘을 즐겼다.


넓게 펼쳐진 들판 가득 초록색이 짙어가는 벼는 가을 땡볕 아래에서 벼 이삭이 단단해지도록 열매를 살찌우느라 바쁘겠지. 쨍쨍한 햇볕만큼이나 벼 이삭은 탱글탱글해질 테니까.


초록이 짙어지는 들녘을 바라보니 아버지의 공책이 생각났다. 아버지는 항상 머리맡에 공책과 볼펜, 휴대전화를 두었다. 한 권이 다 채워지면 새로운 공책을 꺼내서 기록했다. 아버지의 기록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예전에는 몰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알게 되었다. 엄마와 결혼하고 시작했던 기록이 어느 순간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돌아가신 그 이듬해부터 다시 기록은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기록은 30년이 넘은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마치 엄마에게 글로 보여주는 것처럼.


아버지의 남겨진 공책에는 벼농사를 짓는 법이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농사일을 그만둔 지가 수십 년이 지났건만. 초봄 볍씨를 물에 담가 불려 새싹을 트이고 그 볍씨로 모종을 만드는 방법, 언제 볍씨를 불리고, 언제 모내기를 하는지 적혀있었다. 모내기 다음으로는 벌레가 다 먹지 못하게 병충해를 관리하고 가물지 않게 해 논에 적당히 물을 데어 주는 것, 가을걷이할 때라던지, 어떤 품종이 좋은 것인지.

평생 농사를 다시 지으실 생각이었을까. 자식 중 누군가가 농사를 짓겠다고 하면 알려주려고 기록을 남겨놓은 것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기억이 달아날까 미리 적어놓은 것이었을까. 수만 가지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이제는 물을 수가 없다. 다만 추측하고 예전 기억을 더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더 눈부시게 슬프고 예쁜 가을 하늘.


나의 서울 생활이 마무리될 수 있었던 인생의 아주 큰 사건, 어머니와의 영원한 이별은 어쩔 수 없이 나를 다시 아버지의 곁으로 불러들였다. 아버지 혼자 시골에 계시는 것을 염려해서 나는 그렇게 다시 시골 소녀로 돌아왔다. 한편으로는 좋았다. 시골 생활이 그닥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 살았던 우리 동네는 하루에 버스가 10번 정도 다녔다. 어른들이 말하던 ‘읍내’에 볼일이 있어서 나가려면 시간을 잘 맞춰서 나가야 했다. 특히나 오일장이 열리는 날 시장에 가려면 여간 불편했다. 버스가 2시간 남짓에 한 번 다니다 보니 차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어떤 날은 차 문이 터질 것만 같았다. 시장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는 다양한 냄새들이 같이 따라왔다. 견디기 거북한 냄새로는 생선 냄새가 대표적이었다. 그런 날에는 버스가 도착하는 내내 속이 매슥거렸다. 그런 불편함 덕분에 자연스럽게 운전면허를 따야 했다. 아버지는 학원 등록에 면허 종류까지 신경 써주시고 등록비까지 챙겨주었다.

도시 생활에 익숙해져서인지 밤잠이 없고 아침잠이 많은 나에게 새로운 숙제가 생겼다. 저녁 7시가 넘으면 가로등만 띄엄띄엄 남긴 채 온 동네가 깜깜했다. 고요함과 어둑함이 온 마을에 가득했고 가끔 개 짖는 소리가 정적을 깨우는 것이 전부였다. 책을 읽거나 TV를 보는 일이 저녁 식사 후의 일상이 되었고 책이란 것은 이상하게도 펴고 읽기 시작한 지 조금만 지나도 금방 잠을 불러들여 꾸벅이게 했다. 그러니 밤늦게까지 깨어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당시 고3이었던 여동생이 같이 지냈다. 여동생은 새벽 첫차를 타고 학교에 가야 지각을 면했다. 학교에 가는 동생에게 새벽밥을 챙겨 먹여야 하니 새벽 6시 전에는 일어나야 했다. 그래도 겨우 밥상을 차려서 아침밥을 먹이고 도시락을 챙겨서 학교에 보냈다. 어리고 서툴렀던 나의 아침 상차림은 처음 한동안은 전쟁통이 따로 없었다. 이런 일들이 나의 일상을 바꾸기에 충분했고 당연했다. 그러니 좋은 것들이 더 많았다.


주저리주저리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추억이 새록해졌다. 하루하루 지나는 만큼 그리움은 배로 더 커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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