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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딜김 Dec 29. 2020

내 언어의 바깥을 내다본다면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과 <라틴어 수업>을 읽고 생각한 것

‘뭘 잘했다고 울어?”라고 말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언어라면, 그건 그 단어가 진작에 닦아놓은 길일 수도 있는 것이다. (p.135)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 허새로미


예전에 친구와 버스를 타고 가며 얘기를 하던 중, 나이 많은 아저씨가 "아가씨들이 교양이 있어야 한다"며 조용히 하라는 식의 말을 건넨 적이 있다. 공공장소에서 얘기한 것은 잘못이라 치자. 그런데 왜 거기에 꼭 ‘아가씨’와 ‘교양’이라는 말이 앞서야 했을까.


어떤 말은 너무 많은 감정과 위치를 포괄하는 나머지 현상을 제대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남는다.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의 저자는 비난의 의미로 “정 떨어진다”라는 말이 사용되는 현상을 언급하며, “정이 쓰일 자리에 무엇이 대신 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었으면 한다. 너무 많은 것을 포괄하는 감정은, 그것이 제대로 정의되지 않았을 때 상대를 향해 무기로 쓰일 수 있기에”라며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를 낯설게 볼 것을 제안한다.


그래서 어떤 언어는 폭력이 된다. 어떤 언어에 담긴 말은 문자 그대로의 뜻을 너머 여러 겹의 의도가 교묘하게 쌓여 있다. 그래서 그 의도를 해석하지 못하거나 혹은 고의로 해석하지 않는 자는 암묵적인 규범을 어긴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앞서 언급했던 사례에서 "왜 아가씨들이 교양이 있어야 하는데요?"라는 반문을 던졌다고 생각해보자. '조용히 하라'라는 발화자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면 원활한 사회생활이 불가능하다.


자신의 감정을 자신에게 익숙한 언어로만 갈음하는 일은 비좁은 인식 세계에 갇히는 것과 같다. 자신의 언어만을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언어의 바깥을 내다보지 않는 일이다. '교양'이라는 말로 상식을 뭉뚱그리는 일도 그렇다. 그 상식이 보편적인 상식인지, 혹은 구세대적인 상식이건 간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식을 ‘교양’이라는 말로 갈음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본다. 그 말이 너무 많은 것을 포괄한 나머지, 교양이 아닌 것도 교양이 되고, 교양이어야 할 것이 교양이 되지 못하는 불충분한 단어로써 존재하게 된 것은 아닐까.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의 이면을 상상하는 것이야말로 의식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하는 시도와 같다.


그래서 낯선 언어를 학습하는 일은 나의 세계의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창이 되기도 한다. 오래전에 익힌 모국어의 체계가 우리의 인식의 습관을 공고히 다져놓았기에 그 습관에서 쉽사리 벗어나 사고하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갑자기 이유 없는 짜증이 날 때, 우리는 단순히 '짜증'이라는 언어로 표현하지 못할 감정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 감정을 진단할 방법을 모르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럴 때, 내 상태를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찾는 것이야말로 세계를 확장하는 과정의 일환이다.


미분화되지 않았던 감정을 정확히 짚는 언어를 적극적으로 찾는 행위는 그간 언어로 표현되지 못했던 나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알 수 없는 분노에 휩싸여 집에 돌아올 때, 뜬금없는 상황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눈물부터 터져 나올 때 나의 감정을 정의할 수 있는 언어를 끌어오는 것은 해결점을 찾을 수 없었던 상황의 실마리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감정을 언어화하고 두 언어를 오가며 감정의 스펙트럼을 시험해보는 일은 당신의 마음에, 우리의 소통에 분명 큰 힘이 될 것이다.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 허새로미
언어는 그 자체의 학습이 목적이기보다는 하나의 도구로서의 목적이 강합니다. 앞의 강의에서 말했듯이 언어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자 세상을 이해하는 틀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 점을 자꾸 간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p. 55)
<라틴어 수업>, 한동일


언어 체계는 기억과 감정을 구성하는 주요한 수단이기에, 새로운 언어 체계를 수용한 후에는 기존과는 다른 자아가 발현되기도 한다. <라틴어 수업>의 저자는 우리의 언어에서 과거 시제가 유독 많이 쓰이는 점을 예시로 들어, “인간은 오늘을 산다고 하지만 어쩌면 단 한순간도 현재를 살고 있지 않은지도 모릅니다. 과거의 한 시절을 그리워하고, 그때와 오늘을 비교합니다. 미래를 꿈꾸고 오늘을 소모하죠.(p.164)” 라 시사점을 던진다. 이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의식이 반영되어 있기에, 새로운 언어의 체계 속으로 편입되는 자아는 기존의 자아와 다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낯선 언어를 학습하는 것은 곧 모국어의 자아에서 벗어난 새로운 자아를 갖는 일이다.


내 언어의 바깥을 내다보는 것은 나를 낯설게 마주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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