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말로 '00는 사이언스'라는 말은 '00는 반박할 여지없는 진짜'라는 뜻으로 읽힌다. 이 유행어가 시사하는 것처럼, '과학'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명제로서 통한다.
반면, 만약 '과학'이 그것의 반의어처럼 여겨지는'거짓말'로부터 출발했다면 어떨까.
<거짓말의 발명>이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는 현재와 세계와 아주 똑같은, 그러나 모든 종류의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세계를 상정하고 있다. 이 세계에서는 모두가 진실만을 말하고, 소위 ‘하얀 거짓말’ 같은 인사치레조차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진실이고 모두가 진짜만을 말하기 때문에, ‘거짓말’이라는 단어조차 없다. 이 세계에는 종교도 없고, 예술도 우리 세계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가상’이라는 ‘합의된 가짜’ 또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거짓말이 없는 세계에서의 영화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는 매체다.
<거짓말의 발명> 속 광고. 거짓말이 없으니 광고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진지한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면, 거짓말이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면 이 세계의 모습은 현실의 세계와는 아주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영화 속의 세계는 요즘의 우리의 세계와 동일한 발전 수준을 가지고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 불가능하다.
영화의 제목인 <the invention of lying>이 의미하는 것처럼 영화 속 세계에서는 거짓말이 누군가에 의해 발명되었지만, 실제의 세계에서는 거짓말이 주체가 되어 다양한 것들을 발명했다. 인간이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것은 곧 사실의 이면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능력을 바탕으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거짓말'에서부터 출발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만들고, 존재 너머를 탐구하며 세계를 현재의 모습으로 구축할 수 있었다.
반면, '가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부재하는 곳에서는 진실의 근거가 없다. 근거가 있어야만 진실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진실인 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진실을 탐구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진실된 세계지만, 결국 어느 것도 진실되지 못하다. 증명할 필요 없는 진실은 반증될 기회조차 잃어버린다. 결국 과학도, 철학도 없을 것이다.
한편, 거짓말과 과학이 지배하는 현실의 세계에서는'그래도 지구는 평평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그래도 지구는 평평하다>는 여전히 평면 지구론을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flat earther'라고 불리는 이들은 타 음모론자들과는 다르게 그들만의 거대한(!) 커뮤니티를 구축해나간다.
인상 깊은 것은, '평면 지구론자'를 향한 이 다큐멘터리의 시선이다. 영상에서 과학자들은 이들을 비난하는 것도, 그렇다고 이들의 '이론'을 인정하는 것도 아닌, 이들이 '잠재적인 과학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말이 시사하는 것은 '과학'이라는 것은 결국 '태도'의 문제라는 점이다. '천부적인 탐구심'으로 '규범을 거부하는 태도'는 거짓말이 존재하는 우리 세계의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다. 예컨대, 평면 지구론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갖가지 장비를 동원해 실험을 강행한다. 물론 그 실험 역시 자신들의 '이론'을 반증하는 역할을 했을 뿐이지만, 이들은 적어도 과학자로서 가져야 할 탐구심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이미 일종의 과학적 태도를 지닌 사람들인 셈이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던 갈릴레이로 대표되는 현대의 과학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본 다큐멘터리의 원 영문 제목은 'behind the curve'인데, 한국어 제목이 의미를 훨씬 더 잘 살렸다. 최근 넷플릭스가 영문 제목을 번역할 때 단순히 영문을 그대로 번역(예: the fundamentals of caring = 보살핌의 정석)해서 되려 어색한 경우나, 영어의 음을 단순히 한글로 옮긴 것(이전에도 쓴 바 있는 <리빙 위드 유어셀프> 같은 것)들이 많아 개인적으로 불만이었는데, <그래도 지구는 평평하다>는 원제보다 훨씬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