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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꾸 Dec 29. 2020

모든 세상의 애인은 눈사람이다

이병률의 [눈사람 여관]을 읽고


이병률이라는 시인을 처음 알게 된 건 비행기 안에서이다. 새로운 곳으로의 출발점에서 내 바로 옆 좌석 친구는 사진이 잔뜩 들어간 작은 책 한권을 읽고 있었다. 좋은 책이라며 읽어보라고 선뜻 내미는데 사진집 같은 책 속에 몇 자의 지나치게 감상적인 끄적임이 내게는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사진과 짧은 글에 익숙한 요즘 SNS시대에 딱 맞는 책이구나 정도. 『끌림』이라는 그 책을 나는 어느 유명 아마추어 블로거 작가일 거야 정도로 짐작을 했었다. 


‘애인’이라는 단어처럼 가슴 설레는 단어가 또 있을까? 「눈사람 여관」은 그 설렘과 눈사람이라는 금방 녹아 없어져 버리는 물질에 대한 상징성으로 연인에 대한 열정의 소멸성을 담담하게 그린 작품이다.

여관 앞에서

목격이라는 말이 서운하게 느껴지는 건 그런 거지요


‘여관’이라는 이미지는 러브호텔, 연인들의 열정을 펼치는 장소로서 남들에게 보이기는 창피한 그래서 ‘목격이라는 말이 서운하게 느껴지는 건 그런 거지요’ 라고 쓴다. 떳떳치 못한 행동처럼 느껴지기에 ‘보았다’라 하지 않고 ‘목격’이라는 마치 여관에 들어가는 모습이 범죄의 한 장면처럼 ‘목격’으로 표현된다.


눈사람을 데리고 여관에 가요

거짓을 생략하고

이별의 실패를 보러


나흘이면 되겠네요

영원을 압축하기에는

저 연한 달이 독신을 그만두기에는


‘이별의 실패를 보러’, 이 글은 중의적 의미가 있다. 이별을 맞이하기에 실패라고 할 수 도 있으나 이별을 하려 했으나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실패’의 의미. 여관이라는 이미지에서 갖고 있는 찰나의 퇴폐적 상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의미가 된다. ‘눈사람’이라는 단시간적 존재의 사물에서 벗어나 영원을 압축하여 두는 지속성을 가진 존재로의 변화를 보여준다.


「함박눈」은 이 시대 가난한 노년의 모습을 보여준다. 제목에서만 나타나는 ‘함박눈’은 노인의 고단한 삶을 상징한다. 추운겨울 폐휴지를 주워 끌고 가는 노인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보는 듯하다.


한 끼만 묵어도 되는데

오늘은 두 끼나 묵었으예


오늘은 두 끼나 묵어서

안 태워도 되이예


노인의 언어, 그의 안분지족의 대꾸는 구슬픈 민요가락을 듣는 것 같은 리듬이 있어 가슴을 더 아프게 한다.


「면면」에서 보여주는 시인의 글에는 위트가 있다.


아무것도 먹을 것 같지 않은 당신

자리를 비운 사이 슬쩍 열어본 당신의 가방에서

많은 빵을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을 삶의 입체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는 한 면과 보통은 보지 못하는 그 이면. 그건 단지 삶의 입체일 뿐이라고 이야기를 재미있게 표현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수긍과 웃음을 같이 준다.


사람이라고 글자를 치면

자꾸 삶이라는 오타가 되는 것

나는 그것을 삶의 뱃속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뱃속’이라는 시어. 사람은 곧 삶이다. 삶의 뱃속에는 곧 사람이 있다. 사람은 그래서 삶이다.


「붉고 찬란한 당신을」


풀어지게


허공에다 놓아줄까


번지게


물속에다 놓아줄까


대상을 물감으로 비유하여 소유가 아닌 숭배하는 객체로서 그 꿈을 펼쳐 자유롭게 자신의 세계를 펼쳐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려 한다. 하지만 ‘놓아줄까’로 각운을 맞추어 자신을 벗어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의 감정을 나타낸다. ‘-게’와 ‘까’의 각운은 발랄한 리듬을 만들어 동요와 같은 느낌을 자아내며 한 행 다음의 한 줄의 쉼은 부재에 대한 허무감을 주기도 한다.


「여행의 역사」는 사람의 고독에 관한 시다.


아버지, 오셨어요?

하는데

아니다, 나가는 길이다

하신다


---

마음먹은 게 아니라

모두가 마음을 놓고 가는 길이다


이 시에서는 체념이 보인다. 다시 돌아올 자리가 있을 때 ‘여행’이라는 단어를 쓴다. 제 자리는 가고 다시 오고 결국은 그 자리. 결국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안도보다는 공허함을 느낀다.


뒤에서 자꾸 부르는데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人間(인간)이라는 한자어에서 人(인)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기댄 모습이다. 그러나 間(간)은 그 사이 틈을 이야기 한다. 뒤에서 자꾸 부르는데 돌아서면 아무도 없는 이유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절대적인 사람의 고독감을 이야기 한다. 상대방이 있어야 존재감을 느끼지만 결국은 혼자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외로움을 표현한다.


「끝 맛」은 이 시집의 마지막 시이다.


끝이 좋다


라고 첫 행에 쓰지만


누가 가르쳐주기도 전에

끝으로 가 앉으며

그것을 처먹는다


하며 거친 언어를 구사한다. 이런 거친 구사는 ‘끝이 좋다’라는 첫 행에 대한 반의다.


오갈 데 없는 끝을 끌어다

내 뼈에 짓이겨 채워서라도


나는 내 끝으로 이 끝 맛을 무섭게 알다 갈 것이다


오감 중 미감처럼 적극적으로 사람에게 느낌을 전달할 수 있는 건 없다. 이런 미감은 강렬한 쾌락을 동반하기도 한다. 이런 미감에서 ‘끝 맛’이라는 단어는 죽음을 나타낸다. 영원하지 못한 삶에 ‘끝 맛’을 알고 간다는 건 자아를 찾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다.


시집 『눈사람 여관』은 눈사람처럼 금방 녹아버리지만 물이 되어 녹아 땅속으로 스며들어 새 생명의 기초가 되는 영원하지 못하지만 영원한 인간의 삶을 실었다. 담담하고 미화되지 않은 시어는 『끌림』처럼 감성을 자극하는 언어로 대중성을 이끌어 내기는 어렵겠지만 시를 읽으면서 내 안의 나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여지를 주고 또 다른 내안의 사색의 길, 여행길로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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