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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린이 Kirini Aug 02. 2023

쏟아지는 폭우 속 우산이 되어주는 그 사람, 팀장

가끔은 비도 직접 맞아보고 감기도 걸려봐야 성장할 수 있어요.


 회사로부터 UIUX기획으로 직무를 옮겨보겠냐는 제안을 받고, 내가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인지 물었다.

 무엇을 결정하든 내 의사가 가장 중요하나 어지간하면 옮겨주길 바란다고 했다. 잔말 말고 옮기라는 의미였다.


 당시 직무에 큰 불만이 없었던 데다가, 새로운 사무실에서 일하며 적응해야 한다는 점, 아주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이력이 애매해진다는 점이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기획팀의 팀장님에게 연락해서 차 한잔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거절하고 싶은데 거절이 어려운 상황이다. 다른 대안이 없겠느냐. 팀장님께서 저를 거절해달라 부탁했다.' 하지만 그녀는 직전의 부사수가 본인의 머리채를 잡고('팀장님이나 똑바로 하세요!'라며 대들었다고 한다) 사내에 화제가 될 만한 큰 소동을 일으킨 상황이라 본인이 나를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며, 내가 와서 꼭 도와줬으면 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내가 본인의 부사수가 되어준다면 비가 내릴 때 우산이 되어주겠노라 이야기했다.

 그것이 그녀와 나의, 사수와 부사수로의 첫 기억이다. 그렇게 주니어 기획자로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새로운 사무실로 자리를 옮기고, 기획업무를 조금씩 배워나갔다. 기획팀은 팀장님과 나, 두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획의 'ㄱ'도 모르던 나는 그녀가 전달해준 문서 형식들을 받아 익혔다. 일명 기획서라 부르던 문서는 PPT 한 페이지에 휴대폰 모양의 빈 화면 네 개가 들어있는 문서였다.

 '기린 씨, ~~ 앱에 이런 기능 추가할 건데 기획해봐.' 하면 유사한 레퍼런스들을 찾아 이런 식으로 구성하면 되겠군 하고 화면을 그려나갔다.



 기획이라는 업무를 맡기 전, 인문학 전공인 나는 솔직히 개발자라는 직업이 그냥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컴퓨터 너드들이 알 수 없는 코드를 짜는 무언가라고만 생각했고 심지어 기획자라는 직업은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다. 그 때문에 팀장님이 내게 전달해준 기획서라 부르는 그 문서는 내가 아는 기획의 모든 것이었다. 가끔 기획서를 작성하다 '이런 기능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하면 팀장님은 '기린 대리 쓰고 싶으면 써요~'라고 하였으나 전달받은 기획서 폼에 텍스트가 들어갈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개발자가 가끔 와서 이 기능은 어떻게 처리할지 물으면 팀장님은 내게 바로 의문을 던지지 못하도록 막고, 본인이 나서서 구두로 설명해주곤 했다.

 나의 모든 이야기는 팀장님을 통해야 나갈 수 있었고, 나에게 오는 이야기는 모두 팀장님을 통해야 들어올 수 있었다. 모든 피드백은 그녀를 통했다. 본인이 기획에 참여하지 않은 프로젝트까지도!

 그녀는 정말로 내게 우산이 되어주었다.

 때로는 너무 느린 그녀의 업무처리, 과잉보호(?)와 마이크로 컨펌 등이 나와 맞지 않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그녀는 어찌 되었건 우산이 되어준다던 그 약속을 지켜준 고마운 상사였다.




 기획서에 익숙해지고 모든 앱의 UIUX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기획하는 일이 즐거워질 무렵 함께 작업하던 개발자 A양과 친해졌다. 기획자라면 마땅히 알아야 할 법 한 용어도 잘 모르던 내게 A양은 마치 선생님처럼 친절하게 하나하나 용어에서부터 웹의 구성요소까지 따뜻하게 알려주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나에게 우리 팀의 기획서에 대한 개발자들의 의견을 귀띔해주었다. '기린님, 개발자들이 뒤에서 기획서를 보고 그림책이냐고 해요. 상상 코딩한대요. 디스크립션 없이 화면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그녀의 말투도 그녀의 의도도 그 어느 것도 날카롭지 않았으나 나는 그 이야기에 날카롭게 베였다. 내 적성과 제법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나의 일, 나의 기획으로 인해 협업하는 사람들이 뒤에서 고통받고 있었다니... 자리로 돌아와 웹 기획서, 앱 기획서를 구글링 했다. 그 누구도 우리와 같이 디스크립션 없이 그림만 그리는 일은 없었다. 기획에 정답이라는 것은 없으나 모두가 약속한 기획서 작성의 룰이라는 것이 있었다. 

 웃는 얼굴로 황당한 수준의 기획서를 전달하던 나를 보며, 개발자들은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벌거벗겨진 듯한 기분이 들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때 알았다. 팀장님이 씌워주던 우산은 결코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본인 역시 비전공자로 기획을 잘 몰랐으며 그런 본인의 무지를 감추는 우산이었음을... 그리고 동시에 어쩜 이렇게 안일하게 일했을까, 그녀의 뒤에 숨기 바빴던 나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이 몰려왔다.

 때로는 비를 맞아보고, 흠뻑 젖고, 감기에도 걸려보아야 진짜를 배울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후 나는 내가 작성하는 기획서의 형식부터 수정했다. 그리고 기획에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는 분야를 조금씩 배워나갔다. 팀장님은 몇 달 지나지 않아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났고, 나는 개발본부 소속으로 기획업무를 이어가게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팀장님은 그저 기획과 맞지 않는 사람이었고, 내게 악의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기획자로 일하며 총알과도 같은 폭우를 직접 맞고 있지만,

 지금도 여전히 유저와 개발자들의 니즈를 완벽하게 채워주지 못하는 기획자로 매일매일이 반성인 나날을 살고 있지만,

 분명 발전은 있다고 생각한다.



 서비스 기획자의 길에 왕도는 없다. 직접 개발자와 부딪히고, 싸우고, 듣고, 설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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