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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동KimLawdong Jul 20. 2023

무채볶음과 소고기두부덮밥

문학을 소환하는 식재료

문학을 소환하는 식재료


어떤 음식이나 식재료를 보고 있으면 종종 영화 속 장면이나 문학 작품의 한 구절이 떠오를 때가 있다.


부드러운 식빵에 버터나 잼을 바르고 있으면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의 장면이 떠오른다. 아마도 영화가 거의 마무리되어 갈 무렵의 장면일 것이다. 패망을 앞둔 나치의 장교가 유대인 피아니스트인 주인공에게 곡 연주를 부탁한다. 피아니스트는 그에게 연주를 들려준다. 연주를 마친 후 나치 장교는 갈색 종이에 포장된 빵과 잼을 건네는데, 오랫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피아니스트는 잼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며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그때의 표정이 남긴 인상이 강해 빵에 버터나 잼을 바를 때면 종종 그 장면이 머리를 지나간다.


식재료 '무'를 볼 때면 소설가 황순원 님의 <소나기>의 한 장면을 떠올리곤 한다. 소년과 소녀가 동네 여기저기를 다니다가 무를 하나 뽑아 먹는 장면. 기억이 흐려져 누가 먼저 무를 뽑아 먹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소년 또는 소녀 중 누군가가 먼저 무를 뽑아 먹고 "맵고 지려"라고 말하면서 무를 퉤 하고 뱉었던 것 같다. 뒤이어 함께 있던 누군가가 "맵고 지려서 못 먹겠다."라고 따라 말하면서 똑같이 씹었던 무를 뱉어낸다.


찾으려고 하면 금방 원전을 확인해 누가 먼저 무를 뱉었고,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 금방 확인할 수 있을 테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실제로는 위에 써 둔 내용과 꽤나 차이가 있는 내용일지도 모른다.). '문학을 소환하는 식재료'라고 썼지만 실은 소환되는 것은 본래 형태 그대로의 작품이 아니라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영화의 한 장면이나, 문학작품의 한 구절일 테다.


영화를 보았을 때의 혹은 소설을 읽었을 때의 감상과, 당시 그 공간에 대한 감각,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추억, 가령 영화 <피아니스트>는 비디오 대여점에서 비디오를 빌려와 어머니와 함께 봤었다든지, 형이 학교 숙제로 <소나기>의 속편을 써 제출한 일이 있었는데, 나는 (숙제도 없었건만!) 굳이 그걸 80% 이상 베끼고 결말만 내 입맛대로 살짝 바꾼 아류 속편을 써본 일이 있다든지, 형의 같은 반 친구분 중에는 죽은 소녀를 살려내어 새로운 장르로의 도약을 이뤄낸 분도 있다고 들었다든지 하는 것들. 그리고 그 모든 기억이 실제와는 조금 차이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왜곡의 가능성까지 한 데 뒤섞인 어렴풋한 '기억'이 소환된 것이다. 그러니 내 머릿속에서 불려 온 것은 애초에 원형 그대로의 작품이 아니다.


그렇게 소환된 기억은 눈앞에 놓인 식재료에 대한 인상을 빚어내기도 한다. 왠지 매울 것 같은, 어린아이가 먹으면 뱉어낼 것 같은, '으른'의 식재료 무! 한 손으로 움켜쥐었을 때의 그 단단함.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느 순간부터 무를 잘 먹고 있지만, 과연 이런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이제 막 돌이 된 아이도 잘 받아들일 것인가.



집으로 오는 길에 순무 하나와 브로콜리 4개를 매우 저렴한 가격(1,500원!)에 샀다. 아이의 유아식으로 집에 있던 소고기와 두부를 활용한 소고기두부파프리카 덮밥과 무채볶음을 준비했다.



1. 무채볶음

1) 무를 가늘고 길게 채 썬다.

그렇지만 나중에 먹일 때는 가위를 가지고 모두 잘랐는데, 굳이 채를 썰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잘 익을 수 있는 어떤 방법이든 상관없지 않을까. 그렇지만 사진만이라도 그럴듯하게 남기고 싶다면 채를 썰어야 그럴듯해 보이긴 한다!


무채볶음은 별 기대없이 한 것이라 채썰어둔 준비사진밖에 없다.


2) 썰어둔 무채를 참기름에 넣고 달달 볶는다.


3) 달달 볶은 무채에다가 물을 붓고, 무가 충분히 부드러워질 때까지 약한 불에 끓인다.

처음엔 그냥 볶기만 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아이가 씹어 넘길 수 없는 단단함(으른의 무!)이라는 생각에 물을 붓고 끓였다. 메인은 덮밥이라고 생각해서 완성 사진조차 없다!


2. 소고기두부파프리카 덮밥

1) 두부는 아주 작은 육면체로 잘게, 파프리카도 잘게 썰어서 준비한다.


2) 잘게 썬 두부를 팬에 올려 약한 불로 데워 수분을 날려준다.

조금 더 탱글하고 단단한 식감을 주기 위해 두부 조각을 프라이팬에 올려 수분을 날려주었다. 너무 뒤섞으면 모양이 망가지고, 너무 오래 그대로 두면 눌어붙는다.


3) 두부와 파프리카를 함께 볶아준다. 소고기도 귀퉁이에 같이 올려 구워주었다. 소고기는 잘 익힌 뒤 잘게 잘라 두부, 파프리카와 함께 볶는다.


부모도 먹고 힘을 내라고, 아이의 생일 선물로 소고기를 보내주신 분이 계셨다. 선물 보내주신 뜻을 살려 아이와 나눠먹었다(아이는 유아식으로, 나와 아내는 그냥 구워서!).

4) 여기서 굴소스를 한 스푼 두르면 아내가 좋아하는 맛이 될 것이다.


5) 굴소스는 다시 뚜껑을 닫아두고, 볶은 재료들에 전분을 푼 물을 부어 점성 있게 만들어준다.





아이가 나중에 성인이 되었을 때 몇 살 무렵의 일부터를 기억하게 될까. 나는 열심히 더듬어 올라가 보아도 네 살 전의 일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아이가 구체적인 기억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함께 음식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아이가 나중에 그 식재료나 음식을 바라볼 때 나와 함께 요리를 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소환되는 기억은 앞서도 이야기했듯 있는 그대로의 서사의 기억이 아니라, 주관적인 감정이 묻어있는 기억이다. 앞뒤 조금씩 흐려지고 잘려나간 ‘사실의 연대표’에는 그때의 인상, 감각과 같은 것이 자리 잡아 흐려진 부분을 보정할 것이다. 결국 아이와 함께 요리한 음식이나 식재료가 아이에게 좋은 기억이나 추억의 대상으로 남을지는, 음식의 맛보다는 그 기억과 함께 소환되는 나에 대한 감정에 달려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그때가 왔을 때 내가 간절히 바라야 하는 것은 음식의 맛이 아니다.


그보다 내가 노력해야 할 것은, 아이가 나와 함께 한 기억을 떠올리는 일이 즐겁고 행복한 일이 될 수 있도록 부모로서, 어른으로서 좋은 모습을 보이는 일일 것이다. 아이에게, 언젠가 함께 만들어 볼 음식이 따뜻하고 행복한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Ps. 무채볶음과 소고기두부파프리카 덮밥은 당일에도 그럭저럭 잘 먹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어린이집에 점심으로 보냈더니, 무채볶음은 매우 잘 먹었고 덮밥도 파프리카만 거부하였을 뿐 잘 먹었다고 하셨다. 결론적으로 이번 레시피는 망한 레시피가 아니라 성공한 레시피인 것이다. 이 음식을 준비한 것은 아이의 첫 생일날이기도 했고, 가끔 성공하는 이야기도 써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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