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어체로 글쓰기가 제일 어려웠어요
방송작가는 정확히 말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대본'을 만드는 사람이다.
눈으로 읽히는 글이라기보다는 누군가의 입을 통해 말이 되어야 하는 글.
그렇기에 대본은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로 쓰여야 한다.
방송작가 아카데미를 다닐 때부터 내 원고에 따라붙은 피드백은 다소 문어체적이라는 것.
당시 아카데미 선생님께서는 원고를 직접 소리 내어 읽어보면 얼마나 문어체적인지 알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소리 높여 읽어봐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평소 말투를 그대로 대본에 옮겨 쓰자니 글이 너무 가벼워 보이고 글답지 않아 보였다.
더욱 머리가 아픈 건 방송 대본이 어느 정도로 구어체로 쓰여야 하는가는 피디에 따라 작가에 따라 그리고 프로그램에 따라 조금씩 기준이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라디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옆 팀의 한 피디님이 내 원고를 우연히 보고 문장 몇 개를 고쳐 주셨다. 내 나름 열심히 구어체로 쓴 것이었는데 그 피디님은 오히려 문어체에 가까운 문장으로 바꾸어놓았다. 정보성 코너이니 조금 전문적으로 쓰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수정한 원고를 들고 담당 피디님께 컨펌을 받으러 갔다. 그랬더니 방금 전 다른 피디님이 고친 그 부분만 콕콕 집으면서 '이 부분은 너무 딱딱한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는 내가 원래 썼던 문장과 비슷하게 바꾸어놓았다.
과연 대본에 있어서만큼은 정해진 답이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지금 드는 생각이지만, 나는 그 옆 팀 피디님과 같이 일했더라면 참 잘 맞았을 것 같다. 그분이 문장을 고쳐주셨을 때 ‘사실은 나도 그렇게 쓰고 싶었는데...!’라고 생각했다.)
그 후로도 나는 계속해서 문어체 대본에 대한 지적을 받았다. 그리고 ‘좀 더 통통 튀게’ 썼으면 좋겠다는 말도 이따금 들었다.
그래서 원고를 쓸 때면 나 자신에게 암시를 걸곤 했다.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친한 친구한테 문자를 보내거나 메신저를 보낸다고 생각하면서 이야기하듯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런 다음, 앞에서부터 문장을 다듬으면서 어미를 높임말로 고쳐 썼다. 잘 되지 않을 때는 실제로 내가 말하는 것을 녹음한 다음, 그대로 받아 적을 때도 있었다. 그 전보다는 조금 나아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잘 적응되지 않았다. 나의 문장들은 여전히 구어체와 문어체 사이 그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글을 쓰는데 문어체를 써선 안 되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내게는 구어체가 먼 나라의 외국어만큼이나 어렵게 느껴졌다.
입으로 매일 말을 하면서도, 어찌 그 말을 흰 종이 위에 그대로 옮겨놓지 못하는 것인지...
매일같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방송작가에게 필요한 건, 글솜씨보다 말솜씨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말솜씨라곤 없는 나에게 방송작가는 맞지 않는 것 같다고.
그러나 다행히도 라디오를 그만두고 텔레비전 교양 프로그램으로 진로를 옮기면서부터 조금씩 문어체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교양 프로그램은 정보 전달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출연자들 역시 연예인보다는 아나운서나 전문가가 대부분이다. 그렇다 보니 다른 무엇보다도 전문적인 내용을 대본 안에 쉽고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능력이 중요했다. 물론 지루하지 않도록 중간중간 재미있는 멘트나 상황을 더해야 하지만, 예능이나 라디오에 비해서는 부담감이 적은 편이었다.
영화와 소설에 장르가 있듯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장르가 있다면 내 문체는 예능이나 드라마보다는 '교양'이라는 장르에 잘 어울렸던 것이다.
이 소중한 깨달음은 내게 '입봉'이라는 선물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안정적인 길을 걸으며 커리어를 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내 마음속에는 문어체 콤플렉스가 꿈틀거린다.
아무리 교양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 시청자들은 내가 쓴 글을 눈으로 읽지 않고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듣기 때문이다.
여러 번 곱씹으며 읽을 수 있는 책과 달리 영상은 빠르게 스쳐 지나가 버리기 때문에 누구든 한 번 들으면 바로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고 간결해야 한다. 또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선 물론 재미도 있어야 한다.
종이 위에서 끝나지 않는 글. 그 위에 누군가의 목소리를 입고, 영상 속에서 살아 움직여야 하는 글.
그래서 대본을 쓰는 일은 늘 어렵지만 매력적인 일이기도 하다.